프랑스-독일의
화해와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

글. 이용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와 독일, 숙적에서 동반자로
오늘날 통합유럽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오랜 세월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툰 영원한 맞수였다. 본래 형제 나라로 출발해 수백여 년 동안 앙숙으로 지내다가 약 반세기 전부터 동반자 관계를 지향해온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우여곡절은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 펼쳐질 수 있는 영토 분쟁과 역사주권 다툼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흔히 ‘마리안느(Marianne)’와 ‘게르마니아(Germania)’로 표상되는 이 두 이웃은 오랜 갈등과 대립의 세월 속에서 서로에 대해 여러 정형화된 이미지와 환상들을 키워왔다. 악착같은 ‘튜튼 족속(Teutonici)’, 어쩔 수 없는 ‘독일놈(boche)’은 프랑스인의 상상 속에 닻을 내렸고, 독일인의 망상 속에서 갈리아 족속은 ‘프랑스병(매독)’이나 옮기는 타락한 무리요, ‘철천지원수(Erbfeind)’였다. 독일과 프랑스는 적어도 16세기 이후부터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을 펼쳐 왔지만, 두 나라가 상대방을 ‘민족의 적’으로까지 여기게 된 것은 전쟁과 충돌로 얼룩진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두 나라는 19세기 이후로만 나폴레옹전쟁(1803~1815)에서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을 거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에 이르는 사활을 건 전면전을 치렀다.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앙숙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접어들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승전국의 일원으로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프랑스가 전쟁 상태의 공식 종언을 선언한 것은 1951년에 들어서였으며, 50년대에 두 나라의 국민은 과거사의 앙금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여전히 서로를 잠재적 적성국으로 여기며 불신과 의혹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미소 냉전시대의 대두와 유럽공동체의 탄생이라는 급변하는 정세에 부응해서 두 나라는 한 걸음씩 평화 공존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1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과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는 흔히 ‘엘리제조약’이라 불리는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고 양국 관계의 신기원을 열었다. 두 나라는 뿌리 깊은 반목을 청산하기 위해, 정치권의 교섭과 대화를 늘리는 것은 물론 민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로 합의했다. 놀라운 것은 지난 수세기에 걸쳐 갈등과 대립을 거듭해온 양국 관계가 엘리제조약 이후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 최근 반세기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의 전망과 유럽의 미래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우호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교육 합의를 위한 노력
전쟁과 민족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19세기 후반기 이후 라인 강의 양편에서는 호전적인 적개심이 넘쳐흘렀다. 프랑스인과 독일인 사이의 배타적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자민족 중심의 역사교육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 사이,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방불케 하기에 충분했다. 경쟁과 우월감을 부추기는 이러한 자민족 중심 사관과 역사교육이 마침내 20세기에 들어 유럽인들이 두 차례의 엄청난 전쟁을 통해 치러야 했던 자기파멸의 비극적 체험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전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당사자인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난 갈등의 역사를 반성하고 화합을 약속하는 새로운 역사교육을 도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싹튼 것은 바로 이러한 상호 대립과 반목을 조장할 수 있는 자민족 중심의 배타적인 역사교육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가와 역사교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잠시 상호공존의 분위기가 감돌던 1930년대부터 이미 여러 차례 회합을 갖고 상호 반목과 적개심을 부추기는 내용을 역사교과서에서 퇴치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힘썼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제 교과서 협의활동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미약한대로 「1935년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1939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의 모든 교과서 협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국제환경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 교과서 협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역사·지리 교원협회’가, 독일 측에서는 ‘국제 교과서연구소’가 공동 역사교육의 논의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1987년 권고안」과 「1999년 권고안」으로 결실을 맺고, 합의한 권고사항이 하나둘씩 두 나라 역사교과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독일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
역사교육 합의를 위한 반세기에 걸친 오랜 노력은 마침내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획기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2003년, 엘리제조약 40주년을 맞이해 양국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 함께 모인 독일과 프랑스의 청소년들이 독일 총리 슈뢰더와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에게 두 나라가 함께 배울 수 있는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유럽연합으로 상징되는 화합과 공존의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역사의식을 함양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 나라 모두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했으며, 공동 역사교과서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이로써 2006년 가을 신학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독-프 공동 역사교과서」 가 탄생했다. 프랑스 역사교원과 독일 역사교원이 한자리에 모여 논의와 수정을 거치면서 함께 집필한 공동 역사교과서가 『역사(Histoire, Geschichte)』라는 제목을 달고 두 나라에서 각각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으로 동시에 출판된 것이다. 2008년에 두 번째 권이, 2011년에 세 번째 권이 출판됨으로써, 이제 두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같은 역사책으로 배우게 되었다.
두 나라 역사교원들이 함께 쓴 「공동 역사교과서」에는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합의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공동 역사교과서」는 자국민 중심주의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고자 한다. 두 나라가 함께 연루된 공동의 과거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뒤로 하고, 두 나라의 공통점과 차이점, 상호작용을 비교사의 관점에서 개방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민족’과 ‘국경’의 틀을 벗어던진 새 역사교과서는 두 나라의 학생들에게 자국의 역사를 유럽사의 지평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공동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 단원의 말미에 ‘교차 시각’의 장(章)을 두어, 두 나라 사이에 합의가 힘들고 논쟁을 부르는 역사 장면들에 대해서 두 나라의 견해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합의를 보기 힘들고 엇갈린 해석을 낳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해서는 애매하고 절충적인 서술을 제시하기보다 차라리 양측의 관점을 나란히 병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상충된 역사 해석을 견주어 검토하게 해주는 이러한 ‘교차 시각’은 학생들에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자못 획기적인 교과서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의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오늘날 ‘사이좋은 이웃’이자 마치 ‘형제 나라’가 된 듯하다. 독일-프랑스 관계는 그만큼 역사적 앙금이 두텁게 쌓여 있는 한국-일본 관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듯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두 나라 역사가와 교원들의 역사교육 개선 노력은 두 나라 사이의 화합과 연대로 결실을 맺었다. 바야흐로 공영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역사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화합과 공영의 역사교육을 향하여

『에우로파, 우리의 역사』
독-폴 공동 역사교과서, 독일어판과 폴란드어판

독일-프랑스의 사례에 자극을 받아,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가 마침내 탄생했다. 나치즘 과거청산과 전쟁배상금 등 굵직한 정치현안이 등락을 계속하는 가운데도 1970년에 서독과 폴란드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고, 1972년에 독일-폴란드 교과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90년대에 폴란드 민주화와 독일 통일, 독일-폴란드 화친조약 체결 등을 거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청소년 교류와 공동 역사교육 논의가 면면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2011년에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학교 상급반용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는 『에우로파, 우리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2016년에 첫째 권(고대부터 중세까지)이, 2017년에 둘째 권(근대부터 1815년까지)이 출판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를 다룬 셋째 권과 넷째 권은 출판을 앞두고 있다.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는 18세기 ‘폴란드 분할’부터 20세기 ‘폴란드 침공과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인 지배-피지배 관계를 맺게 된 두 나라 사이에는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합의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갈등의 역사에서 화합의 역사로 나아가려는 열린 역사교육은 현재진행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악연을 맺은 이스라엘과 독일은 2010년에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양국의 학교 교과서를 함께 연구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유대주의에 적극 대처하고 문명의 화합과 선린을 도모하기 위해 합의된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랜 식민지배와 유혈 해방전쟁의 악연을 맺은 프랑스와 알제리는 알제리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합의된 역사교육과 공동 역사교과서 제작을 위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아랍계 이주민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앓는 프랑스는 식민지배 과거사 청산과 무슬림과의 화합이라는 당면과제에 전향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공동 역사교육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독도 문제를 계기로, 그리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 식민지배 과거사로 인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갈등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양국 정부 사이의 정치적 해결책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공동 역사교육을 통한 역사인식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 양측의 공동 역사연구와 교육을 위한 논의와 노력이 면면히 이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한-일간 논의의 답보상태는 화합의 역사교육을 향해 처음으로 큰 걸음을 내딛은 독일-프랑스의 놀라운 성취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오랜 노력과 성과는 새삼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용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프랑스-독일의
화해와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

글. 이용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와 독일, 숙적에서 동반자로
오늘날 통합유럽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오랜 세월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툰 영원한 맞수였다. 본래 형제 나라로 출발해 수백여 년 동안 앙숙으로 지내다가 약 반세기 전부터 동반자 관계를 지향해온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우여곡절은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 펼쳐질 수 있는 영토 분쟁과 역사주권 다툼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흔히 ‘마리안느(Marianne)’와 ‘게르마니아(Germania)’로 표상되는 이 두 이웃은 오랜 갈등과 대립의 세월 속에서 서로에 대해 여러 정형화된 이미지와 환상들을 키워왔다. 악착같은 ‘튜튼 족속(Teutonici)’, 어쩔 수 없는 ‘독일놈(boche)’은 프랑스인의 상상 속에 닻을 내렸고, 독일인의 망상 속에서 갈리아 족속은 ‘프랑스병(매독)’이나 옮기는 타락한 무리요, ‘철천지원수(Erbfeind)’였다. 독일과 프랑스는 적어도 16세기 이후부터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을 펼쳐 왔지만, 두 나라가 상대방을 ‘민족의 적’으로까지 여기게 된 것은 전쟁과 충돌로 얼룩진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두 나라는 19세기 이후로만 나폴레옹전쟁(1803~1815)에서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을 거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에 이르는 사활을 건 전면전을 치렀다.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앙숙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접어들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승전국의 일원으로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프랑스가 전쟁 상태의 공식 종언을 선언한 것은 1951년에 들어서였으며, 50년대에 두 나라의 국민은 과거사의 앙금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여전히 서로를 잠재적 적성국으로 여기며 불신과 의혹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미소 냉전시대의 대두와 유럽공동체의 탄생이라는 급변하는 정세에 부응해서 두 나라는 한 걸음씩 평화 공존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1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과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는 흔히 ‘엘리제조약’이라 불리는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고 양국 관계의 신기원을 열었다. 두 나라는 뿌리 깊은 반목을 청산하기 위해, 정치권의 교섭과 대화를 늘리는 것은 물론 민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로 합의했다. 놀라운 것은 지난 수세기에 걸쳐 갈등과 대립을 거듭해온 양국 관계가 엘리제조약 이후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 최근 반세기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의 전망과 유럽의 미래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우호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교육 합의를 위한 노력
전쟁과 민족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19세기 후반기 이후 라인 강의 양편에서는 호전적인 적개심이 넘쳐흘렀다. 프랑스인과 독일인 사이의 배타적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자민족 중심의 역사교육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 사이,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방불케 하기에 충분했다. 경쟁과 우월감을 부추기는 이러한 자민족 중심 사관과 역사교육이 마침내 20세기에 들어 유럽인들이 두 차례의 엄청난 전쟁을 통해 치러야 했던 자기파멸의 비극적 체험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전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당사자인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난 갈등의 역사를 반성하고 화합을 약속하는 새로운 역사교육을 도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싹튼 것은 바로 이러한 상호 대립과 반목을 조장할 수 있는 자민족 중심의 배타적인 역사교육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가와 역사교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잠시 상호공존의 분위기가 감돌던 1930년대부터 이미 여러 차례 회합을 갖고 상호 반목과 적개심을 부추기는 내용을 역사교과서에서 퇴치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힘썼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제 교과서 협의활동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미약한대로 「1935년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1939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의 모든 교과서 협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국제환경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 교과서 협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역사·지리 교원협회’가, 독일 측에서는 ‘국제 교과서연구소’가 공동 역사교육의 논의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1987년 권고안」과 「1999년 권고안」으로 결실을 맺고, 합의한 권고사항이 하나둘씩 두 나라 역사교과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독일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
역사교육 합의를 위한 반세기에 걸친 오랜 노력은 마침내 공동 역사교과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획기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2003년, 엘리제조약 40주년을 맞이해 양국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 함께 모인 독일과 프랑스의 청소년들이 독일 총리 슈뢰더와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에게 두 나라가 함께 배울 수 있는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유럽연합으로 상징되는 화합과 공존의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역사의식을 함양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 나라 모두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했으며, 공동 역사교과서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이로써 2006년 가을 신학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독-프 공동 역사교과서」 가 탄생했다. 프랑스 역사교원과 독일 역사교원이 한자리에 모여 논의와 수정을 거치면서 함께 집필한 공동 역사교과서가 『역사(Histoire, Geschichte)』라는 제목을 달고 두 나라에서 각각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으로 동시에 출판된 것이다. 2008년에 두 번째 권이, 2011년에 세 번째 권이 출판됨으로써, 이제 두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같은 역사책으로 배우게 되었다.
두 나라 역사교원들이 함께 쓴 「공동 역사교과서」에는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합의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공동 역사교과서」는 자국민 중심주의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고자 한다. 두 나라가 함께 연루된 공동의 과거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뒤로 하고, 두 나라의 공통점과 차이점, 상호작용을 비교사의 관점에서 개방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민족’과 ‘국경’의 틀을 벗어던진 새 역사교과서는 두 나라의 학생들에게 자국의 역사를 유럽사의 지평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공동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 단원의 말미에 ‘교차 시각’의 장(章)을 두어, 두 나라 사이에 합의가 힘들고 논쟁을 부르는 역사 장면들에 대해서 두 나라의 견해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합의를 보기 힘들고 엇갈린 해석을 낳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해서는 애매하고 절충적인 서술을 제시하기보다 차라리 양측의 관점을 나란히 병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상충된 역사 해석을 견주어 검토하게 해주는 이러한 ‘교차 시각’은 학생들에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자못 획기적인 교과서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의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오늘날 ‘사이좋은 이웃’이자 마치 ‘형제 나라’가 된 듯하다. 독일-프랑스 관계는 그만큼 역사적 앙금이 두텁게 쌓여 있는 한국-일본 관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듯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두 나라 역사가와 교원들의 역사교육 개선 노력은 두 나라 사이의 화합과 연대로 결실을 맺었다. 바야흐로 공영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역사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화합과 공영의 역사교육을 향하여

『에우로파, 우리의 역사』
독-폴 공동 역사교과서, 독일어판과 폴란드어판

독일-프랑스의 사례에 자극을 받아,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가 마침내 탄생했다. 나치즘 과거청산과 전쟁배상금 등 굵직한 정치현안이 등락을 계속하는 가운데도 1970년에 서독과 폴란드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고, 1972년에 독일-폴란드 교과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90년대에 폴란드 민주화와 독일 통일, 독일-폴란드 화친조약 체결 등을 거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청소년 교류와 공동 역사교육 논의가 면면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2011년에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중학교 상급반용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는 『에우로파, 우리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2016년에 첫째 권(고대부터 중세까지)이, 2017년에 둘째 권(근대부터 1815년까지)이 출판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를 다룬 셋째 권과 넷째 권은 출판을 앞두고 있다.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는 18세기 ‘폴란드 분할’부터 20세기 ‘폴란드 침공과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인 지배-피지배 관계를 맺게 된 두 나라 사이에는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합의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갈등의 역사에서 화합의 역사로 나아가려는 열린 역사교육은 현재진행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악연을 맺은 이스라엘과 독일은 2010년에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양국의 학교 교과서를 함께 연구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유대주의에 적극 대처하고 문명의 화합과 선린을 도모하기 위해 합의된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랜 식민지배와 유혈 해방전쟁의 악연을 맺은 프랑스와 알제리는 알제리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합의된 역사교육과 공동 역사교과서 제작을 위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아랍계 이주민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앓는 프랑스는 식민지배 과거사 청산과 무슬림과의 화합이라는 당면과제에 전향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공동 역사교육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독도 문제를 계기로, 그리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 식민지배 과거사로 인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갈등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양국 정부 사이의 정치적 해결책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공동 역사교육을 통한 역사인식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 양측의 공동 역사연구와 교육을 위한 논의와 노력이 면면히 이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한-일간 논의의 답보상태는 화합의 역사교육을 향해 처음으로 큰 걸음을 내딛은 독일-프랑스의 놀라운 성취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오랜 노력과 성과는 새삼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용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