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사회의 변화교육의 방향

글. 박구용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왜 신은 죽었는가?

인류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선조들이 살아온 시대, 내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후손들이 살아갈 시대가 다르지 않아서다. 큰 변화가 없으니 특정 시대의 의미와 특징을 논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사에서 자기 시대를 처음으로 문제 설정한 학자는 헤겔(G. W. F. Hegel)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자기 시대를 사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헤겔은 먼저 그가 살던 시대를 ‘현대(Moderne Zeit)’라고 이름 붙인다. 헤겔에게 현대는 단순히 현재가 아니다. 현대는 현(現) 시대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라는 뜻을 품고 있다. 현대는 끝없이 변하는 시대다. 현대는 끝나지 않고 갱신된다. 매 순간 새로운 시대로 변화하는 현대에서 변하는 않는 동질적 본질이나 통일적 이상은 없다. 현대는 이질적이고 다원적인 세계다. 헤겔과 같은 학자들은 끝없이 변화하는 현대를 관통하는 통일의 힘을 찾고자 했다. 이것이 현대의 기획이다.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과 이 열망을 이성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현대의 기획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었다. 현대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 주술, 마법, 신화는 어둠 속으로 추방된다. 자연조차 그동안 누렸던 신적 지위를 상실한다. 자연은 인식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추락한다. 현대의 기획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리와 정의의 기준은 더 이상 신의 이름을 빌린 종교가 제공하지 않는다. 진리와 정의는 신의 법정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 신성에서 이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리켜 니체(F. Nietzsche)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신의 죽음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은유다. 신의 죽음은 종교의 무의미나 무가치를 말하지 않는다. 신의 죽음은 종교적 신념이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과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나누고 살피는 일이 되었다.

현대의 기획은 실패했는가?

신의 죽음을 선고하고 등장한 인간 이성 중심의 현대적 기획은 성공했는가?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에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줄지 않고 있다. 제국의 황제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큼이나 굶주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과학과 공학의 발달과 생산력의 놀라운 증가만큼이나 핵전쟁, 드론을 이용한 생화학 전쟁의 위험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붕괴와 지구 소멸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왜 현대의 기획은 화려한 만큼 위험해진 것일까? 인간의 이성은 왜 인간성을 파괴하는 기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많은 학자들이 현대의 기획에 대해 비관적인 진단을 내렸다. 그 중에서 4차 산업혁명이 기계를 인간화하는 만큼 인간을 기계화할 것이라는 진단이 가장 염세적이다. 기계의 인간화와 인간의 기계화가 기다리는 미래는 유토피아일 수도 있고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세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미래 사회를 예측할 수 있는가?

미래학이 생겨난 이래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변화의 방향과 속도가 예측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아주 짧은 시간 후에 과거로 밀려난다. 예측 가능성이 낮아진 만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미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미래 사회의 본질적 특성이다. 교육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교육의 지평에서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지속 가능한 교육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먼저 교육을 어느 관점에서 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먼저 학생이나 학부모의 눈으로 교육을 보면 어떨까? 그들에게 교육은 자아 발견이나 자아실현, 혹은 자아 형성의 과정일까? 그럴듯한 말들이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에게 교육은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특히 성과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한 개인의 교환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런 무한경쟁 체계의 교육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경쟁은 교육의 친구인가, 적인가?

경쟁은 교육의 적인가?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은 무한경쟁 체계다.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울 수 있는 평가 체계, 그 순서에 따라 대학을 줄 세우는 진학 체계, 그리고 다시 그 줄에 따라 직장이 결정되는 인력배치 체계다. 이 체계에선 승자와 패자만 있다. 아주 작은 수만 크게 성공하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하는 체계다. 이런 체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럼 경쟁을 없애야 할까? 경쟁 없는 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들은 다양하게 경쟁 없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행한다.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때론 지속 가능한 대안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국가가 설계하는 교육은 경쟁을 멀리할 수 없다.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통치자나 경영인은 인력을 평가·배치·선별하고, 이를 위한 상벌 체계를 교육으로 이해한다. 이들에게 교육은 선별 체계, 선발 체계, 상벌 체계로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이들에겐 현재의 무한경쟁 교육도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경쟁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교육에 투영된 학생과 학부모의 욕망은 경쟁력이다. 국가가 성취하려는 욕망도 경쟁력이다. 이 욕망을 악으로 치부하며 경쟁 없는 교육을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과거 교육도, 미래 교육도 경쟁이라는 엔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무한경쟁 엔진은 교육을 불태울 위험이 크다. 무한경쟁 교육은 교육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개인과 국가가 욕망하는 경쟁력도 키우지 못한다.

미래 교육에선 어떤 경쟁을 해야 할까?

미래 사회에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경쟁력을 키우려면 경쟁을 해야 한다. 다만 경쟁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하나의 기준, 하나의 지표, 하나의 시험으로 경쟁하는 길을 피해야 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경쟁하는 교육은 대부분의 학생을 패배자로 만든다. 거꾸로 모든 학생이 각자 다른 기준, 다른 지표, 다른 시험으로 경쟁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미래 사회에서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시간표는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같은 진도로 한 교실의 학생을 동일하게 가르치는 교육은 야만으로 치부될 것이다.
미래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육은 모든 학생이 자신의 교육 방향을 기획하고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기획과 구성에 동참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미래의 학생은 자신의 시간표와 진도표를 가지고 유사한 표를 가진 학생과 자유롭게 학습할 것이다. 교사는 이들의 요구와 부름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는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준을 세우고 유사한 기준을 가진 학생들과 만나서 소통하며 연대하는 경쟁을 할 것이다. 미래의 경쟁은 승패가 아니라 협력이다.

인간은 왜 죽어가고 있는가?

4차 산업혁명이 끌어가는 미래는 기계가 인간화된 사회다. 인공지능은 현재의 모든 인간이 가진 정보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갖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로봇, 드론, 자동차와 생활용품, 그리고 전쟁 기계들은 이성 중심의 세계에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M. Foucault)는 이미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다. 푸코는 지식을 배치하는 체계가 바뀌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 것이라 했다.
빅 데이터(Big Data)는 지식의 배치와 의미 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현대의 기획에서 지식은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정당화된 진리와 정의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빅 데이터 시대의 지식은 데이터와 그것을 재구성하는 알고리즘으로 대체된다. 지식의 배치가 바뀌고 있으니 진리와 정의의 기준을 제공해온 인간은 사라질 위험성이 높다. 인간은 진리와 정의의 주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 있다. 개개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의식조차 데이터로 전환되어 수집되고 재구성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고전적인 지식 체계다. 현대의 기획은 존재와 사유 관계를 전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현대를 상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이 명제조차 이제 새로운 전복의 위기에 직면했다. 미래의 나는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그러니 곧 다음의 명제가 미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나는 데이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기계와 경쟁하는 교육을 해야 할까?

인간이 특수한 알레고리로 재구성된 데이터로 전락될 수 있는 미래 사회에서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할까? 미래의 인간은 매 순간 데이터를 생산하는 체계에 진입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지능도 인공지능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러니 데이터 소유량을 가지고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교육은 삶의 가치를 높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도 높이지 못한다. 기계가 잘하는 것은 기계에 맡겨야 한다. 인간화된 기계와 경쟁하면 인간이 기계가 된다. 기계와 경쟁하지 않는 교육의 방향을 잡으려면 기계가 잘하는 일과 못 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먼저 기계는 계산의 천재지만 사고의 천재는 아니다. 특히 기계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뒤쳐진다.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기준의 정당성을 따지는 능력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니 교육은 무엇보다 기계를 구성하고 사용하면서 그것에 의해 인간이 조정되지 않기 위해 비판적 사유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계산은 기계에게 맡겨야 한다.
머지않은 시점에 기계는 입증·논증·예측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능가할 것이다. 심지어 기계는 스파이크 존즈(S. Jonze) 감독의 영화 <그녀(Her)>에서처럼 인간과의 정서적 소통 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그녀’에겐 몸이 없다. 그렇다면 교육은 몸과 몸,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교통과 소통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체적 의사소통 능력은 인간의 기계화를 차단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교육 분야다. 물론 언젠가 인간과 동일한 몸을 가진 ‘그녀’가 나타날 수 있다. 그때 ‘그녀’는 더 이상 인간화된 기계가 아니라 인간 자체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 때문에 미래의 인간은 매 순간 예측하지 못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교육이 여전히 문제 해결 능력(problem solving ability)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문제 해결 능력을 문제 풀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 해결 능력에서 핵심은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 찾기다. 불확정적 미래 사회에서 문제 찾기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주 먼 훗날에도 문제를 찾는 이는 주인이고, 주인이 찾은 문제를 푸는 이는 노예다.

놀이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모든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시간이다. 모든 생명은 제한된 시간만 생명을 유지한다. 그만큼 모든 생명에게 시간 구성은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미래의 시간 구성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으로만 삶을 구성했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생산 시간과 재생산 시간뿐이다. 미래 사회의 인간은 노동이나 휴식보다 놀이에 시간을 더 많이 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는 ‘학교 공간 혁신 프로젝트’는 미래 교육의 지평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학생 스스로 공간을 구성하는 경험은 미래의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구성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다. 여기에 ‘학교 시간 혁신 프로젝트’가 더해져야 한다. 학생들이 노동과 휴식이 아닌 놀이로 시간을 구성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학생들이 놀이 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의 주권자가 되는 교육이 진정한 미래 교육이다.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시간을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는 날, 그 꿈 같은 날을 꿈꾸는 것이 미래 사회 교육의 방향이다.

박구용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독일 이상주의와 비판이론을 전공했으며, 사회·정치 철학과 미학 분야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 광주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광주시민자유대학 이사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미래 사회의 변화교육의 방향

글. 박구용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왜 신은 죽었는가?

인류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선조들이 살아온 시대, 내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후손들이 살아갈 시대가 다르지 않아서다. 큰 변화가 없으니 특정 시대의 의미와 특징을 논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사에서 자기 시대를 처음으로 문제 설정한 학자는 헤겔(G. W. F. Hegel)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자기 시대를 사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헤겔은 먼저 그가 살던 시대를 ‘현대(Moderne Zeit)’라고 이름 붙인다. 헤겔에게 현대는 단순히 현재가 아니다. 현대는 현(現) 시대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라는 뜻을 품고 있다. 현대는 끝없이 변하는 시대다. 현대는 끝나지 않고 갱신된다. 매 순간 새로운 시대로 변화하는 현대에서 변하는 않는 동질적 본질이나 통일적 이상은 없다. 현대는 이질적이고 다원적인 세계다. 헤겔과 같은 학자들은 끝없이 변화하는 현대를 관통하는 통일의 힘을 찾고자 했다. 이것이 현대의 기획이다.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과 이 열망을 이성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현대의 기획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었다. 현대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 주술, 마법, 신화는 어둠 속으로 추방된다. 자연조차 그동안 누렸던 신적 지위를 상실한다. 자연은 인식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추락한다. 현대의 기획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리와 정의의 기준은 더 이상 신의 이름을 빌린 종교가 제공하지 않는다. 진리와 정의는 신의 법정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 신성에서 이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리켜 니체(F. Nietzsche)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신의 죽음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은유다. 신의 죽음은 종교의 무의미나 무가치를 말하지 않는다. 신의 죽음은 종교적 신념이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과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나누고 살피는 일이 되었다.

현대의 기획은 실패했는가?

신의 죽음을 선고하고 등장한 인간 이성 중심의 현대적 기획은 성공했는가?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에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줄지 않고 있다. 제국의 황제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큼이나 굶주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과학과 공학의 발달과 생산력의 놀라운 증가만큼이나 핵전쟁, 드론을 이용한 생화학 전쟁의 위험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붕괴와 지구 소멸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왜 현대의 기획은 화려한 만큼 위험해진 것일까? 인간의 이성은 왜 인간성을 파괴하는 기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많은 학자들이 현대의 기획에 대해 비관적인 진단을 내렸다. 그 중에서 4차 산업혁명이 기계를 인간화하는 만큼 인간을 기계화할 것이라는 진단이 가장 염세적이다. 기계의 인간화와 인간의 기계화가 기다리는 미래는 유토피아일 수도 있고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세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미래 사회를 예측할 수 있는가?

미래학이 생겨난 이래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변화의 방향과 속도가 예측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아주 짧은 시간 후에 과거로 밀려난다. 예측 가능성이 낮아진 만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미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미래 사회의 본질적 특성이다. 교육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교육의 지평에서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지속 가능한 교육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먼저 교육을 어느 관점에서 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먼저 학생이나 학부모의 눈으로 교육을 보면 어떨까? 그들에게 교육은 자아 발견이나 자아실현, 혹은 자아 형성의 과정일까? 그럴듯한 말들이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에게 교육은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특히 성과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한 개인의 교환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런 무한경쟁 체계의 교육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경쟁은 교육의 친구인가, 적인가?

경쟁은 교육의 적인가?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은 무한경쟁 체계다.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울 수 있는 평가 체계, 그 순서에 따라 대학을 줄 세우는 진학 체계, 그리고 다시 그 줄에 따라 직장이 결정되는 인력배치 체계다. 이 체계에선 승자와 패자만 있다. 아주 작은 수만 크게 성공하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하는 체계다. 이런 체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럼 경쟁을 없애야 할까? 경쟁 없는 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들은 다양하게 경쟁 없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행한다.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때론 지속 가능한 대안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국가가 설계하는 교육은 경쟁을 멀리할 수 없다.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통치자나 경영인은 인력을 평가·배치·선별하고, 이를 위한 상벌 체계를 교육으로 이해한다. 이들에게 교육은 선별 체계, 선발 체계, 상벌 체계로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이들에겐 현재의 무한경쟁 교육도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경쟁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교육에 투영된 학생과 학부모의 욕망은 경쟁력이다. 국가가 성취하려는 욕망도 경쟁력이다. 이 욕망을 악으로 치부하며 경쟁 없는 교육을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과거 교육도, 미래 교육도 경쟁이라는 엔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무한경쟁 엔진은 교육을 불태울 위험이 크다. 무한경쟁 교육은 교육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개인과 국가가 욕망하는 경쟁력도 키우지 못한다.

미래 교육에선 어떤 경쟁을 해야 할까?

미래 사회에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경쟁력을 키우려면 경쟁을 해야 한다. 다만 경쟁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하나의 기준, 하나의 지표, 하나의 시험으로 경쟁하는 길을 피해야 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경쟁하는 교육은 대부분의 학생을 패배자로 만든다. 거꾸로 모든 학생이 각자 다른 기준, 다른 지표, 다른 시험으로 경쟁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미래 사회에서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시간표는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같은 진도로 한 교실의 학생을 동일하게 가르치는 교육은 야만으로 치부될 것이다.
미래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육은 모든 학생이 자신의 교육 방향을 기획하고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기획과 구성에 동참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미래의 학생은 자신의 시간표와 진도표를 가지고 유사한 표를 가진 학생과 자유롭게 학습할 것이다. 교사는 이들의 요구와 부름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는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준을 세우고 유사한 기준을 가진 학생들과 만나서 소통하며 연대하는 경쟁을 할 것이다. 미래의 경쟁은 승패가 아니라 협력이다.

인간은 왜 죽어가고 있는가?

4차 산업혁명이 끌어가는 미래는 기계가 인간화된 사회다. 인공지능은 현재의 모든 인간이 가진 정보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갖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로봇, 드론, 자동차와 생활용품, 그리고 전쟁 기계들은 이성 중심의 세계에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M. Foucault)는 이미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다. 푸코는 지식을 배치하는 체계가 바뀌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 것이라 했다.
빅 데이터(Big Data)는 지식의 배치와 의미 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현대의 기획에서 지식은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정당화된 진리와 정의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빅 데이터 시대의 지식은 데이터와 그것을 재구성하는 알고리즘으로 대체된다. 지식의 배치가 바뀌고 있으니 진리와 정의의 기준을 제공해온 인간은 사라질 위험성이 높다. 인간은 진리와 정의의 주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 있다. 개개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의식조차 데이터로 전환되어 수집되고 재구성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고전적인 지식 체계다. 현대의 기획은 존재와 사유 관계를 전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현대를 상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이 명제조차 이제 새로운 전복의 위기에 직면했다. 미래의 나는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그러니 곧 다음의 명제가 미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나는 데이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기계와 경쟁하는 교육을 해야 할까?

인간이 특수한 알레고리로 재구성된 데이터로 전락될 수 있는 미래 사회에서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할까? 미래의 인간은 매 순간 데이터를 생산하는 체계에 진입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지능도 인공지능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러니 데이터 소유량을 가지고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교육은 삶의 가치를 높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도 높이지 못한다. 기계가 잘하는 것은 기계에 맡겨야 한다. 인간화된 기계와 경쟁하면 인간이 기계가 된다. 기계와 경쟁하지 않는 교육의 방향을 잡으려면 기계가 잘하는 일과 못 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먼저 기계는 계산의 천재지만 사고의 천재는 아니다. 특히 기계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뒤쳐진다.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기준의 정당성을 따지는 능력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니 교육은 무엇보다 기계를 구성하고 사용하면서 그것에 의해 인간이 조정되지 않기 위해 비판적 사유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계산은 기계에게 맡겨야 한다.
머지않은 시점에 기계는 입증·논증·예측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능가할 것이다. 심지어 기계는 스파이크 존즈(S. Jonze) 감독의 영화 <그녀(Her)>에서처럼 인간과의 정서적 소통 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그녀’에겐 몸이 없다. 그렇다면 교육은 몸과 몸,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교통과 소통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체적 의사소통 능력은 인간의 기계화를 차단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교육 분야다. 물론 언젠가 인간과 동일한 몸을 가진 ‘그녀’가 나타날 수 있다. 그때 ‘그녀’는 더 이상 인간화된 기계가 아니라 인간 자체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 때문에 미래의 인간은 매 순간 예측하지 못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교육이 여전히 문제 해결 능력(problem solving ability)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문제 해결 능력을 문제 풀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 해결 능력에서 핵심은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 찾기다. 불확정적 미래 사회에서 문제 찾기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주 먼 훗날에도 문제를 찾는 이는 주인이고, 주인이 찾은 문제를 푸는 이는 노예다.

놀이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모든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시간이다. 모든 생명은 제한된 시간만 생명을 유지한다. 그만큼 모든 생명에게 시간 구성은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미래의 시간 구성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으로만 삶을 구성했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생산 시간과 재생산 시간뿐이다. 미래 사회의 인간은 노동이나 휴식보다 놀이에 시간을 더 많이 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는 ‘학교 공간 혁신 프로젝트’는 미래 교육의 지평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학생 스스로 공간을 구성하는 경험은 미래의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구성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다. 여기에 ‘학교 시간 혁신 프로젝트’가 더해져야 한다. 학생들이 노동과 휴식이 아닌 놀이로 시간을 구성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학생들이 놀이 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의 주권자가 되는 교육이 진정한 미래 교육이다.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시간을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는 날, 그 꿈 같은 날을 꿈꾸는 것이 미래 사회 교육의 방향이다.

박구용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독일 이상주의와 비판이론을 전공했으며, 사회·정치 철학과 미학 분야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 광주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광주시민자유대학 이사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