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쓴다는 것,
접속과 창조의 배움

책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글. 한승희 북원중학교 교사

방학동안 3학년 학생 한 명과 함께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었다. 마지막 만나는 날 글을 한 편 써오라고 했더니 재밌는 글을 써 왔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이 현재 자기가 하는 공부와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것이 삶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게 이유였다. 놀라운 건 그 학생이 전교 1등이라는 점 이었다. 공부와 삶의 괴리로 인한 소외감은 성적과 상관없이 느끼고 있는 마음이었다.

지혜를 찾는 길, 책을 향한 절실한 질문이 필요하다
필자 역시 이따금 감정, 욕망, 습관이라는 삶의 실제 문제를 만났을 때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는지 회의를 느끼곤 한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힘을 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길은 없는 걸까?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교! 저자의 말대로 교육의 핵심은 ‘책’이고, 학생과 교사는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삶의 지혜로부터 멀어지는 소외감을 떨칠 수 없는 걸까? 성실함과 노력, 수업 기술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책’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고. 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가 바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교육은 책을 읽되, 책에 담긴 존재의 원리와 세계의 이치를 완전히 무시
한다. (중략) 안다는 건 질문한다는 뜻이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그것이 앎
이다. 그러니 질문이 없다는 건 책에 담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하여, 책에 담긴 원리와 이치, 삶의 서사 등은 허공을 맴돌고 있다.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2019, 북드라망, 61쪽

책이 무엇이기에? 동・서양의 경전과 고전, 인문학, 의학, 과학 등 책은 그 자체로 우주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찾아낸 삶의 길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는 ‘존재의 원리와 세계의 이치’가 담겨있다. 교과서도 그 이치를 정리한 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책에 절실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이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해서, 교과서의 수많은 언어들은 삶과 괴리되어 평가지에서만 맴돈다. 이런 현실에서 천지인의 이치를 담은 고전을 직접 읽고 글을 써 보자고하는 건 더욱 가닿지 못하는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거룩하고 통쾌하게! 접속하고, 창조하라!
학교에서 매일 들고 다니는 ‘책’, 그리고 매 수업에서 나누는 ‘말’과 ‘글’의 본성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질문해본 적이 있던가? 어쩌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수업 이론과 실천 사례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활동의 본성을 깊이 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안다고 생각했던 ‘읽고 쓰기’에 대한 질문부터 다시 해보자. 읽는 다는 건 인간에게 있어 어떤 행위인가? 사실 우리는 책만을 읽지는 않는다. 만나는 사람을,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모두 ‘읽는다’. 이는 읽는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앎’과 접속하는 직접적인 행위라는 걸 말한다. 살아있다면 알고 싶고, 알고 싶다면 누구나 읽는다.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읽기’라는 접속과 동시에 일어나는 창조적 변용을 말한다. 즉, ‘앎’과 접속하며 생겨난 나의 지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
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
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 같은 책, 86쪽

접속과 창조의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책과 세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그 알아차림의 계기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이 고통 속에 잠겨있을 때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역사 안에서 세상과 연결된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죽음, 고통과 내 삶이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필자는 삶의 모든 것들과의 연결성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세상 안에서 내 존재를 세우고 싶어진 것이다. 이 마음은 삶에서 겪는 모든 만남을 ‘읽기’로 접속하여 배우고, 나의 언어로 써 내며 살겠다는 비전으로 이어졌다. 읽고 쓴다는 건 이처럼 세상과 접속하여 자기 삶의 길을 창조하는 거룩하고 통쾌한 공부다.

소외에서 우정으로! 함께 배우는 관계의 탄생
이처럼 거룩하고 통쾌한 공부를 할 때 우리의 ‘몸’ 또한 변한다. 몸은 쾌락만을 원하지 않는다. 존재의 평온함과 충만함, 그리고 자유를 원한다. 몸이 변하면 다른 관계를 원하기 시작한다. 이 기쁨을 함께할 친구를.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 같은 책, 101쪽

저자는 권위, 재물, 격정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힐링과 멘토링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를 ‘벗’이라고 한다. 학교 안에서 동료교사, 또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이 관계가 가능할까? 함께 책을 읽는다면 가능하다! 지배, 경쟁, 계몽에서 벗어나 함께 배우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것이 어렵거나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직접 한 번 읽어보자! 공자와 붓다가 느낀 지극한 앎의 기쁨과 내 존재의 심층적 차원이 연결되는 거룩함, 나를 옭아매던 고통을 비전으로 전환하는 통쾌한 자유를 직접 느껴보는 것이다. 이 기쁨을 먼저 맛본 사람은 누군가에게 ‘동참’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앎’을 함께 탐구하며, 삶의 길을 같이 찾아보자는 우정의 손길을!

읽고 쓴다는 것,
접속과 창조의 배움

책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글. 한승희 북원중학교 교사

방학동안 3학년 학생 한 명과 함께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었다. 마지막 만나는 날 글을 한 편 써오라고 했더니 재밌는 글을 써 왔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이 현재 자기가 하는 공부와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것이 삶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게 이유였다. 놀라운 건 그 학생이 전교 1등이라는 점 이었다. 공부와 삶의 괴리로 인한 소외감은 성적과 상관없이 느끼고 있는 마음이었다.

지혜를 찾는 길, 책을 향한 절실한 질문이 필요하다
필자 역시 이따금 감정, 욕망, 습관이라는 삶의 실제 문제를 만났을 때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는지 회의를 느끼곤 한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힘을 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길은 없는 걸까?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교! 저자의 말대로 교육의 핵심은 ‘책’이고, 학생과 교사는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삶의 지혜로부터 멀어지는 소외감을 떨칠 수 없는 걸까? 성실함과 노력, 수업 기술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책’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고. 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가 바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교육은 책을 읽되, 책에 담긴 존재의 원리와 세계의 이치를 완전히 무시한다. (중략) 안다는 건 질문한다는 뜻이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그것이 앎이다. 그러니 질문이 없다는 건 책에 담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하여, 책에 담긴 원리와 이치, 삶의 서사 등은 허공을 맴돌고 있다.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2019, 북드라망, 61쪽

책이 무엇이기에? 동・서양의 경전과 고전, 인문학, 의학, 과학 등 책은 그 자체로 우주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찾아낸 삶의 길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는 ‘존재의 원리와 세계의 이치’가 담겨있다. 교과서도 그 이치를 정리한 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책에 절실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이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해서, 교과서의 수많은 언어들은 삶과 괴리되어 평가지에서만 맴돈다. 이런 현실에서 천지인의 이치를 담은 고전을 직접 읽고 글을 써 보자고하는 건 더욱 가닿지 못하는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거룩하고 통쾌하게! 접속하고, 창조하라!
학교에서 매일 들고 다니는 ‘책’, 그리고 매 수업에서 나누는 ‘말’과 ‘글’의 본성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질문해본 적이 있던가? 어쩌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수업 이론과 실천 사례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활동의 본성을 깊이 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안다고 생각했던 ‘읽고 쓰기’에 대한 질문부터 다시 해보자. 읽는 다는 건 인간에게 있어 어떤 행위인가? 사실 우리는 책만을 읽지는 않는다. 만나는 사람을,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모두 ‘읽는다’. 이는 읽는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앎’과 접속하는 직접적인 행위라는 걸 말한다. 살아있다면 알고 싶고, 알고 싶다면 누구나 읽는다.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읽기’라는 접속과 동시에 일어나는 창조적 변용을 말한다. 즉, ‘앎’과 접속하며 생겨난 나의 지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 같은 책, 86쪽

접속과 창조의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책과 세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그 알아차림의 계기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이 고통 속에 잠겨있을 때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역사 안에서 세상과 연결된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죽음, 고통과 내 삶이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필자는 삶의 모든 것들과의 연결성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세상 안에서 내 존재를 세우고 싶어진 것이다. 이 마음은 삶에서 겪는 모든 만남을 ‘읽기’로 접속하여 배우고, 나의 언어로 써 내며 살겠다는 비전으로 이어졌다. 읽고 쓴다는 건 이처럼 세상과 접속하여 자기 삶의 길을 창조하는 거룩하고 통쾌한 공부다.

소외에서 우정으로! 함께 배우는 관계의 탄생
이처럼 거룩하고 통쾌한 공부를 할 때 우리의 ‘몸’ 또한 변한다. 몸은 쾌락만을 원하지 않는다. 존재의 평온함과 충만함, 그리고 자유를 원한다. 몸이 변하면 다른 관계를 원하기 시작한다. 이 기쁨을 함께할 친구를.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 같은 책, 101쪽

저자는 권위, 재물, 격정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힐링과 멘토링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를 ‘벗’이라고 한다. 학교 안에서 동료교사, 또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이 관계가 가능할까? 함께 책을 읽는다면 가능하다! 지배, 경쟁, 계몽에서 벗어나 함께 배우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것이 어렵거나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직접 한 번 읽어보자! 공자와 붓다가 느낀 지극한 앎의 기쁨과 내 존재의 심층적 차원이 연결되는 거룩함, 나를 옭아매던 고통을 비전으로 전환하는 통쾌한 자유를 직접 느껴보는 것이다. 이 기쁨을 먼저 맛본 사람은 누군가에게 ‘동참’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앎’을 함께 탐구하며, 삶의 길을 같이 찾아보자는 우정의 손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