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금속활자전수교육관 & 고인쇄박물관

평소에도 주말이면 자연과 문화가 숨 쉬는 현장을 즐겨 찾는 가족. 이번에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의 고장 청주를 찾았다. 1500도의 쇳물이 눈앞에서 활자로 돋아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이 디지털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장과 기록의 근본적인 가치를 일깨우던 시간. 말과 생각과 정신을 문자로써 기록하고자 했던 조상의 지혜 앞에, 아빠는 어린 딸의 손을 꼭 잡아본다.

글. 이경희 취재작가 | 사진. 안지섭

활자의 탄생을 목격하다

이른 아침 길을 달려 ‘금속활자전수교육관’에 먼저 도착하였다. 옛 고려인의 복장으로 전통방식의 활자주조 기술을 시연하는 광경에서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유산인 금속활자 제작 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임을 실감한다.
이제 막 시작될 시연을 관람하기 위해 아빠 이흥철 씨와 은서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엄마도 함께였을 테지만 몸이 아픈 강아지를 돌봐야 했기에, 오늘은 아빠와 은서 둘만의 여행이 됐다. ‘중요무형문화재 101호’이자 ‘금속활자장’인 임인호 선생이 은서의 이름과 나이를 물으며 친근한 인사를 건넨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에 대해, 아홉 살 아이는 어떤 관심을 갖고 있을지, 준비된 활자본을 들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듯하다.
선생은 “우리 민족은 불을 잘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말로 최초의 금속활자 탄생의 의미를 소개했다. 또 활자를 만드는 작업을 두고 ‘감자를 굽는 것과 한 가지’라든가, 글자본이 잘 분리되도록 이형제를 쓰는 것은 ‘국수 만들 때 붙지 않게 하려는 원리’와 같다며, 생활 속 지혜를 문화 발전에 적용한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설명한다. 아이 눈높이에 맞는 쉬운 설명 덕분인지, 거푸집 틀이 완성된 것을 보고 은서는 아빠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이건 케이크 만드는 거 같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어주는 아빠. 아침에 집을 나서며 두 사람은 금속활자와 인쇄술, 자랑스러운 우리 기록문화유산인 ‘직지’에 대해 나름의 사전 지식을 나누고 왔다. 그러니 시연자의 행동 하나, 설명 한 마디가 모두 생생하게 전달되고, 금속활자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 쇳물을 녹여 활자를 뜨고 책을 찍어내는 기술의 놀라움, 이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높은 문화적 성취 등이 옛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게 펼쳐진다. 마침내 1500도의 쇳물을 완성된 거푸집에 붓고, 위아래 틀을 분리하여 활자들이 드러나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와! 글자가 나왔다!”하는 탄성과 함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가지쇠에서 막 떼어낸 활자엔 ‘행복’, ‘한국’, ‘직지’, ‘국민’ 등이 새겨져 있다. ‘불’과 ‘쇠’와 ‘혼’으로 탄생시킨 금속활자 발명의 순간을 잠시나마 들여다 본 순간이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활자, 한지 위에 새겨보는 특별한 추억

과거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과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주물사주조법으로 시연되었다. 시연이 이루어지는 내내 활자장 선생은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1230년대에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한 거예요. 우리에게 그런 DNA가 흐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인쇄술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한 역사는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킨 인류사적 발명이며, 그중에서도 금속활자는 인쇄술의 꽃이라 할 수 있으니 그걸 세계 최초로 발명한 민족의 후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다는 얘기다.
시연이 다 끝나고 교육관을 나서기 전 간단한 ‘인출 체험’도 해보았다. 이미 만들어진 조판에 먹을 입혀 한지에 찍어보는 작업이다. 종이 위에 찍혀 나오는 활자의 느낌을 손끝의 감촉으로 이해해 볼 수 있었다. 은서가 인쇄한 것은 ‘오륜행실도’의 한 페이지. 직접 인쇄한 기념품을 말아들고 나서는 아이의 얼굴에 환한 햇살이 쏟아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역사 속 ‘직지’를 만나는 시간

금속활자교육전수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며 아빠가 딸에게 묻는다.
“여기 생각 안 나? 예전에 엄마랑 셋이 왔었는데.”
갸우뚱하다 도리질하는 은서를 번쩍 안아 목말을 태우는 아빠.
“너 네 살 때 왔었지~ 이렇게 아빠 어깨를 타고.”
까르르 웃으며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해설사 선생님들이 친절히 맞이해 주신다. 바로 정면 입구에는 ‘직지’의 대형 금속활자복원판이 세워져 있다. 잠시 말없이 올려다보는 부녀의 모습이 진지하다.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간행되었으며, 독일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류문화사에끼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설명을 듣다가 은서는 아빠에게 실제 직지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아~ 그건 선생님이 얘기해 줄게. 진짜 직지는 여기에 없고 프랑스에 있단다.”
해설사가 의문에 대신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바로 걸음을 옮겨 ‘직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물을 보여주었다. 사본으로 제작되어 전시된 직지는 한 장 한 장 넘길 수도 있어 흥미와 실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한때 ‘직지심경’으로 잘못 알려진 적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 등으로 부르는 게 맞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이 직지가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여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천년을 빛나는 위대함, 미래세대의 꿈으로 이어질 희망의 등불

지난 천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불리는 금속활자 발명은 정보화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인류문화 발달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직지가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2004년 4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 보호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직지상’을 제정함으로써, 직지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확고해졌다. 해설사는 세계기록유산과 관련한 상으로는 최초이며 한 국가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한 상으로도 유일하다고 소개했다.
직지와 관련된 1전시관의 전시를 두루 살피고 난 후엔 고려와 조선의 인쇄문화를 볼 수 있는 2전시관이 이어져 있다. 고려의 목판인쇄술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전통 인쇄문화 전반이 소개돼 있었다. 3전시관은 동서양의 인쇄문화를 소개하는 곳으로, 일본이나 중국의 인쇄문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로 알려진 유럽의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초등 저학년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은서는 전시관의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모두 살피고 난 후에야 박물관을 나섰다. 박물관이든 놀이동산이든 ‘끝까지’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라며 아빠는 은서의 왕성한 호기심을 칭찬해 주었다.
“책을 통해 알던 내용이지만 이렇게 직접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게 되니, 이해도 쉽고 재밌네요. 은서와 이렇게 나와서 함께 경험하는 게 어른인 저에게도 큰 즐거움인 거 같습니다.”
아빠는 박물관에서 받은 팸플릿이든, 식당의 메뉴판이든 글자로 찍혀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 아이가 갖는 관심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는 걸 보고 내심 뿌듯했다. 모든 걸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을지라도,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이 아이의 기억 속에 어떤 ‘느낌’으로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빠랑 같이 다니니까 좋았고, 제가 모르는 걸 대답해 주는 아빠가 참 고마웠어요.”
은서의 한 마디에서 오늘 하루 여행에 대한 감상과 보람이 묻어 나온다.

청주 금속활자전수교육관 & 고인쇄박물관

평소에도 주말이면 자연과 문화가 숨 쉬는 현장을 즐겨 찾는 가족. 이번에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의 고장 청주를 찾았다. 1500도의 쇳물이 눈앞에서 활자로 돋아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이 디지털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장과 기록의 근본적인 가치를 일깨우던 시간. 말과 생각과 정신을 문자로써 기록하고자 했던 조상의 지혜 앞에, 아빠는 어린 딸의 손을 꼭 잡아본다.

글. 이경희 취재작가 | 사진. 안지섭

활자의 탄생을 목격하다

이른 아침 길을 달려 ‘금속활자전수교육관’에 먼저 도착하였다. 옛 고려인의 복장으로 전통방식의 활자주조 기술을 시연하는 광경에서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유산인 금속활자 제작 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임을 실감한다.
이제 막 시작될 시연을 관람하기 위해 아빠 이흥철 씨와 은서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엄마도 함께였을 테지만 몸이 아픈 강아지를 돌봐야 했기에, 오늘은 아빠와 은서 둘만의 여행이 됐다. ‘중요무형문화재 101호’이자 ‘금속활자장’인 임인호 선생이 은서의 이름과 나이를 물으며 친근한 인사를 건넨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에 대해, 아홉 살 아이는 어떤 관심을 갖고 있을지, 준비된 활자본을 들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듯하다.
선생은 “우리 민족은 불을 잘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말로 최초의 금속활자 탄생의 의미를 소개했다. 또 활자를 만드는 작업을 두고 ‘감자를 굽는 것과 한 가지’라든가, 글자본이 잘 분리되도록 이형제를 쓰는 것은 ‘국수 만들 때 붙지 않게 하려는 원리’와 같다며, 생활 속 지혜를 문화 발전에 적용한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설명한다. 아이 눈높이에 맞는 쉬운 설명 덕분인지, 거푸집 틀이 완성된 것을 보고 은서는 아빠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이건 케이크 만드는 거 같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어주는 아빠. 아침에 집을 나서며 두 사람은 금속활자와 인쇄술, 자랑스러운 우리 기록문화유산인 ‘직지’에 대해 나름의 사전 지식을 나누고 왔다. 그러니 시연자의 행동 하나, 설명 한 마디가 모두 생생하게 전달되고, 금속활자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 쇳물을 녹여 활자를 뜨고 책을 찍어내는 기술의 놀라움, 이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높은 문화적 성취 등이 옛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게 펼쳐진다. 마침내 1500도의 쇳물을 완성된 거푸집에 붓고, 위아래 틀을 분리하여 활자들이 드러나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와! 글자가 나왔다!”하는 탄성과 함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가지쇠에서 막 떼어낸 활자엔 ‘행복’, ‘한국’, ‘직지’, ‘국민’ 등이 새겨져 있다. ‘불’과 ‘쇠’와 ‘혼’으로 탄생시킨 금속활자 발명의 순간을 잠시나마 들여다 본 순간이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활자, 한지 위에 새겨보는 특별한 추억

과거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과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주물사주조법으로 시연되었다. 시연이 이루어지는 내내 활자장 선생은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1230년대에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한 거예요. 우리에게 그런 DNA가 흐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인쇄술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한 역사는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킨 인류사적 발명이며, 그중에서도 금속활자는 인쇄술의 꽃이라 할 수 있으니 그걸 세계 최초로 발명한 민족의 후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다는 얘기다.
시연이 다 끝나고 교육관을 나서기 전 간단한 ‘인출 체험’도 해보았다. 이미 만들어진 조판에 먹을 입혀 한지에 찍어보는 작업이다. 종이 위에 찍혀 나오는 활자의 느낌을 손끝의 감촉으로 이해해 볼 수 있었다. 은서가 인쇄한 것은 ‘오륜행실도’의 한 페이지. 직접 인쇄한 기념품을 말아들고 나서는 아이의 얼굴에 환한 햇살이 쏟아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역사 속 ‘직지’를 만나는 시간

금속활자교육전수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며 아빠가 딸에게 묻는다.
“여기 생각 안 나? 예전에 엄마랑 셋이 왔었는데.”
갸우뚱하다 도리질하는 은서를 번쩍 안아 목말을 태우는 아빠.
“너 네 살 때 왔었지~ 이렇게 아빠 어깨를 타고.”
까르르 웃으며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해설사 선생님들이 친절히 맞이해 주신다. 바로 정면 입구에는 ‘직지’의 대형 금속활자복원판이 세워져 있다. 잠시 말없이 올려다보는 부녀의 모습이 진지하다.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간행되었으며, 독일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류문화사에끼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설명을 듣다가 은서는 아빠에게 실제 직지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아~ 그건 선생님이 얘기해 줄게. 진짜 직지는 여기에 없고 프랑스에 있단다.”
해설사가 의문에 대신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바로 걸음을 옮겨 ‘직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물을 보여주었다. 사본으로 제작되어 전시된 직지는 한 장 한 장 넘길 수도 있어 흥미와 실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한때 ‘직지심경’으로 잘못 알려진 적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 등으로 부르는 게 맞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이 직지가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여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천년을 빛나는 위대함, 미래세대의 꿈으로 이어질 희망의 등불

지난 천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불리는 금속활자 발명은 정보화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인류문화 발달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직지가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2004년 4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 보호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직지상’을 제정함으로써, 직지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확고해졌다. 해설사는 세계기록유산과 관련한 상으로는 최초이며 한 국가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한 상으로도 유일하다고 소개했다.
직지와 관련된 1전시관의 전시를 두루 살피고 난 후엔 고려와 조선의 인쇄문화를 볼 수 있는 2전시관이 이어져 있다. 고려의 목판인쇄술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전통 인쇄문화 전반이 소개돼 있었다. 3전시관은 동서양의 인쇄문화를 소개하는 곳으로, 일본이나 중국의 인쇄문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로 알려진 유럽의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초등 저학년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은서는 전시관의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모두 살피고 난 후에야 박물관을 나섰다. 박물관이든 놀이동산이든 ‘끝까지’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라며 아빠는 은서의 왕성한 호기심을 칭찬해 주었다.
“책을 통해 알던 내용이지만 이렇게 직접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게 되니, 이해도 쉽고 재밌네요. 은서와 이렇게 나와서 함께 경험하는 게 어른인 저에게도 큰 즐거움인 거 같습니다.”
아빠는 박물관에서 받은 팸플릿이든, 식당의 메뉴판이든 글자로 찍혀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 아이가 갖는 관심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는 걸 보고 내심 뿌듯했다. 모든 걸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을지라도,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이 아이의 기억 속에 어떤 ‘느낌’으로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빠랑 같이 다니니까 좋았고, 제가 모르는 걸 대답해 주는 아빠가 참 고마웠어요.”
은서의 한 마디에서 오늘 하루 여행에 대한 감상과 보람이 묻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