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교육적 의미

글.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아름다운 나라를 위한 플라톤의 고민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8~348년)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에서 혼란스러운 아테네를 대체할 이상적인 국가를 구상했다. 『국가』는 마치 연극 대본처럼 대화의 형식을 취한다. 이 철학적 드라마의 주인공은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역사적 소크라테스라기보다는 플라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가면을 쓰고 대화를 주도해나가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이 책은 기원전 380년쯤에 집필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년)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전체를 위한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나라를 ‘칼리폴리스(Kallipolis)’, 즉 ‘아름다운 나라’라고 불렀다.
어떻게 아름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대화 초반에 교육에 방점을 찍었다. 시민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나라가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고, 학생들 가운데 뛰어난 자가 철학자의 반열에 이르러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산자가 절제의 미덕으로 성실하게 일해 국가의 부를 이루고, 수호자들이 용감하게 나라를 지키며, 철학자가 지혜롭게 다스려 각자가 자기 몫을 다할 수 있게 한다면, 그 나라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시민들을 키워내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소크라테스’는 어린아이들의 건강한 몸을 키우는 체육과 건전한 마음을 위한 시가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가(詩歌)’는 그리스 말로 ‘무시케(mousike-)’인데, 이는 오늘날의 ‘뮤직(music)’보다 더 넓은 뜻이다. 노래와 음악뿐만 아니라, 운율을 갖춘 서사시, 비극, 희극, 즉 오늘날의 문학을 포함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이야기(muthos)’ 교육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마음에 좋은 생각을 심어줄 수 있고, 결국 훌륭한 사람을 키울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나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의 마음에는 나쁜 생각이 심어져 자라나 결국 나쁜 어른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시민이 되어 이루는 나라는 결국 나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대 존경받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판하며, 그런 시인들은 자신의 이상 국가인 ‘아름다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추방되어야 할까?

신들의 계보와 권력 투쟁 이야기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아킬레우스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두 편의 서사시에 담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신화를 가득 채우는 수많은 신들의 계보를 태초로부터 정리해서 영웅들의 족보와 인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그려낸 독보적인 시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상당 부분은 이들의 작품에 터를 두고 있다.
먼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를 보자. 그에 따르면, 태초에 카오스가 가장 먼저 생겨났다. 카오스는 그 이후에 나올 모든 존재들을 품을 거대한 우주 공간과도 같은 신이었다. 그 안에 땅의 여신 가이아가 나타났고, 땅 아래 깊은 곳 타르타로스와 사랑의 신 에로스가 함께 태어났다. 카오스는 암흑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신 닉스를 낳은 후, 더 이상의 자식을 낳지 않았다. 타르타로스는 특별히 자식이 없었고, 에로스도 다른 이들이 사랑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 뿐, 자신은 자식을 낳지 않은 것 같다. 이들과 달리 땅의 신 가이아는 왕성한 생산력을 과시했다. 가이아는 혼자 하늘(우라노스)을 낳아 위로 띄워 자기 주위를 완전히 감싸게 했고, 산(오로스)들을 낳아 자기 몸 위에 돋아나게 했으며, 바다(폰토스)를 낳아 자신을 둘러싸며 흐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땅의 여신 가이아는 세계를 지배하는 최초의 실세가 되었다.
가이아는 자식들 가운데 우라노스(하늘)를 남편으로 삼았고 12명의 티탄들을 낳았다. 남편과 자식들을 거느리면 안정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우라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남편이 되고 자식까지 거느리자, 가이아를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가이아와 충돌했다. 최초의 세대 간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우라노스는 12 티탄들 이외에도 가이아로부터 세 명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백 개의 팔을 가진 세 명의 거인도 낳았다. 그런데 강력한 아들들에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땅속 깊은 곳, 즉 어머니의 뱃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로 당해야 했고,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우라노스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우라노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2 티탄들을 모아 아버지를 거세할 자를 구했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모반을 부추긴 것이다. 모두 아버지를 겁내면서 망설일 때, 막내였던 크로노스(시간)가 나섰다.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최고의 권좌에 오르겠다는 야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이아는 흐뭇했고 크로노스에게 불멸의 금속으로 만든 낫을 주었다.

어머니로부터 낫을 받아든 크로노스는 은밀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밤이 되자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와 거대한 몸을 펼쳐 우라노스의 남근을 거세했다. 부자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반란의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제거하고 권좌에 오르자 크로노스도 맘이 변했다. 가이아의 말을 거스르기 시작했고, 절대적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누이 가운데 레아를 아내로 삼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족족 다섯이나 집어삼켰다. 자신이 쫓아낸 아버지 우라노스와, 권력을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왔으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이아의 저주 때문이었다. 부부는 크로노스에게 그가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것처럼 태어나는 자식에게 제압되고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거세하고, 자신을 도왔던 어머니를 무시한 것에 그치지 않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집어삼켰다.
남편의 폭력적인 행동에 분노한 레아는 여섯째를 임신했을 때, 가이아와 우라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크로노스에게 배신당한 두 부부는 포악한 자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아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여섯째 아이를 크레타 섬의 한 동굴에 숨기고, 그 대신 큰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크로노스는 자식들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돌덩이를 여섯째 아이인 줄 알고 삼켰다. 크레타로 빼돌려진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는데, 그가 바로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가 삼켰던 형제자매를 모두 토해내게 만들었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그리스 신화는 교육적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를 어른들이 즐길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전해준다는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신들의 권력 다툼이 사납고 폭력적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불미스러운 갈등이라는 점이 더욱더 못마땅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는 가운데 전통과 역사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구상하는 아름다운 나라에서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을 추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헤시오도스가 전해주는 신들의 계보,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나쁜 것이며, 그것을 듣고 읽는 아이들은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며 자라날 것이고, 그들이 어른이 되어 이루는 공동체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언제나 시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육적으로 나쁜 이야기는 검열하고 색출해서 싹을 잘라 버려야 하며, 아름답고 건전한 이야기만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담긴 그리스 신화는 교육적으로 해악한 것이었다.
호메로스의 영웅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난세를 평정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영웅의 말과 뜻은 고상하고 그 행동은 신중하고 진지하며 품격이 있어야 한다.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기품 있는 태도와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영웅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롤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분노에 휩싸여 동료를 저주했고, 전투에 나가지 않으면서 아군의 패배를 열망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죽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땅바닥을 구르며 애통해하고,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꼴불견의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전쟁과 모험을 겪는 동안 그들을 위험과 죽음에서 구하지 못한 채,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영웅이며,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모습의 영웅 이야기를 교육 현장에서 들려주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에 대해서조차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스 사람들은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신들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으며, 호메로스의 영웅을 용맹함과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여기며 끊임없이 대를 이어 전해주었던가?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이런 이야기가 풍미한 그리스 문명이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이야기로 대접받고 있는가?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이야기는 인류를 병들게 하는 것일 텐데, 왜 여전히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상상력의 보고로 여기고 인류의 귀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며 사랑하고 있는가?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의 눈에 이런 현상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묻다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적어도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고 말하곤 한다. 첫째는 출산이고, 둘째는 교육이다. 출산이 인간 역사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리적 조건이라면, 교육은 인간의 역사를 여타의 동물들의 역사와 다르게 하는 정신적인 조건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충분하게 낳고, 자신들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때, 즉 충분하게 교육이 이루어질 때, 인간의 역사는 의미 있게 이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는 세대교체의 양상을 띤다. 따라서 교육의 현장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만나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역사적 만남에는 보수적인 측면과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기성세대는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인류가 축적해 놓은 지식과 정보를 내놓고 전수해 주면서, 전통적인 생활과 사고의 가치를 입증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보여 주고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일차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 전수의 작업은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삶에 맞는 지식과 정보를 새롭게 찾아내는 한편, 새로운 방식의 생활과 사고를 창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과 자유를 인정하고 북돋아 주어야만 한다. 결국 교육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너희들이 가야 하며 너희들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진보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적어도 이런 진보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 나가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용기를 주며, 기성세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촉구한다. 실제로 역사의 발전은 고분고분 어른들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보다는 거침없이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도전하는 사람들과 동시대에 불화하는 창의적 실험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이런 도전 정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그리스라는 나라의 운명과는 달리, 그 자체로 서구인들에게로,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역동성을 가지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현재에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건강한 교육, 그리고 역동하는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 같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을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다. 현재 교육부 미래교육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리스 신화
교육적 의미

글.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아름다운 나라를 위한 플라톤의 고민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8~348년)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에서 혼란스러운 아테네를 대체할 이상적인 국가를 구상했다. 『국가』는 마치 연극 대본처럼 대화의 형식을 취한다. 이 철학적 드라마의 주인공은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역사적 소크라테스라기보다는 플라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가면을 쓰고 대화를 주도해나가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이 책은 기원전 380년쯤에 집필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년)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전체를 위한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나라를 ‘칼리폴리스(Kallipolis)’, 즉 ‘아름다운 나라’라고 불렀다.
어떻게 아름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대화 초반에 교육에 방점을 찍었다. 시민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나라가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고, 학생들 가운데 뛰어난 자가 철학자의 반열에 이르러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산자가 절제의 미덕으로 성실하게 일해 국가의 부를 이루고, 수호자들이 용감하게 나라를 지키며, 철학자가 지혜롭게 다스려 각자가 자기 몫을 다할 수 있게 한다면, 그 나라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시민들을 키워내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소크라테스’는 어린아이들의 건강한 몸을 키우는 체육과 건전한 마음을 위한 시가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가(詩歌)’는 그리스 말로 ‘무시케(mousike-)’인데, 이는 오늘날의 ‘뮤직(music)’보다 더 넓은 뜻이다. 노래와 음악뿐만 아니라, 운율을 갖춘 서사시, 비극, 희극, 즉 오늘날의 문학을 포함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이야기(muthos)’ 교육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마음에 좋은 생각을 심어줄 수 있고, 결국 훌륭한 사람을 키울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나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의 마음에는 나쁜 생각이 심어져 자라나 결국 나쁜 어른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시민이 되어 이루는 나라는 결국 나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대 존경받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판하며, 그런 시인들은 자신의 이상 국가인 ‘아름다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추방되어야 할까?

신들의 계보와 권력 투쟁 이야기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아킬레우스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두 편의 서사시에 담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신화를 가득 채우는 수많은 신들의 계보를 태초로부터 정리해서 영웅들의 족보와 인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그려낸 독보적인 시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상당 부분은 이들의 작품에 터를 두고 있다.
먼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를 보자. 그에 따르면, 태초에 카오스가 가장 먼저 생겨났다. 카오스는 그 이후에 나올 모든 존재들을 품을 거대한 우주 공간과도 같은 신이었다. 그 안에 땅의 여신 가이아가 나타났고, 땅 아래 깊은 곳 타르타로스와 사랑의 신 에로스가 함께 태어났다. 카오스는 암흑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신 닉스를 낳은 후, 더 이상의 자식을 낳지 않았다. 타르타로스는 특별히 자식이 없었고, 에로스도 다른 이들이 사랑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 뿐, 자신은 자식을 낳지 않은 것 같다. 이들과 달리 땅의 신 가이아는 왕성한 생산력을 과시했다. 가이아는 혼자 하늘(우라노스)을 낳아 위로 띄워 자기 주위를 완전히 감싸게 했고, 산(오로스)들을 낳아 자기 몸 위에 돋아나게 했으며, 바다(폰토스)를 낳아 자신을 둘러싸며 흐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땅의 여신 가이아는 세계를 지배하는 최초의 실세가 되었다.
가이아는 자식들 가운데 우라노스(하늘)를 남편으로 삼았고 12명의 티탄들을 낳았다. 남편과 자식들을 거느리면 안정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우라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남편이 되고 자식까지 거느리자, 가이아를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가이아와 충돌했다. 최초의 세대 간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우라노스는 12 티탄들 이외에도 가이아로부터 세 명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백 개의 팔을 가진 세 명의 거인도 낳았다. 그런데 강력한 아들들에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땅속 깊은 곳, 즉 어머니의 뱃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로 당해야 했고,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우라노스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우라노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2 티탄들을 모아 아버지를 거세할 자를 구했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모반을 부추긴 것이다. 모두 아버지를 겁내면서 망설일 때, 막내였던 크로노스(시간)가 나섰다.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최고의 권좌에 오르겠다는 야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이아는 흐뭇했고 크로노스에게 불멸의 금속으로 만든 낫을 주었다.

어머니로부터 낫을 받아든 크로노스는 은밀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밤이 되자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와 거대한 몸을 펼쳐 우라노스의 남근을 거세했다. 부자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반란의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제거하고 권좌에 오르자 크로노스도 맘이 변했다. 가이아의 말을 거스르기 시작했고, 절대적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누이 가운데 레아를 아내로 삼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족족 다섯이나 집어삼켰다. 자신이 쫓아낸 아버지 우라노스와, 권력을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왔으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이아의 저주 때문이었다. 부부는 크로노스에게 그가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것처럼 태어나는 자식에게 제압되고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거세하고, 자신을 도왔던 어머니를 무시한 것에 그치지 않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집어삼켰다.
남편의 폭력적인 행동에 분노한 레아는 여섯째를 임신했을 때, 가이아와 우라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크로노스에게 배신당한 두 부부는 포악한 자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레아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여섯째 아이를 크레타 섬의 한 동굴에 숨기고, 그 대신 큰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크로노스는 자식들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돌덩이를 여섯째 아이인 줄 알고 삼켰다. 크레타로 빼돌려진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는데, 그가 바로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가 삼켰던 형제자매를 모두 토해내게 만들었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그리스 신화는 교육적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를 어른들이 즐길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전해준다는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신들의 권력 다툼이 사납고 폭력적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불미스러운 갈등이라는 점이 더욱더 못마땅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는 가운데 전통과 역사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구상하는 아름다운 나라에서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을 추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헤시오도스가 전해주는 신들의 계보,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나쁜 것이며, 그것을 듣고 읽는 아이들은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며 자라날 것이고, 그들이 어른이 되어 이루는 공동체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언제나 시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육적으로 나쁜 이야기는 검열하고 색출해서 싹을 잘라 버려야 하며, 아름답고 건전한 이야기만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담긴 그리스 신화는 교육적으로 해악한 것이었다.
호메로스의 영웅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난세를 평정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영웅의 말과 뜻은 고상하고 그 행동은 신중하고 진지하며 품격이 있어야 한다.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기품 있는 태도와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영웅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롤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분노에 휩싸여 동료를 저주했고, 전투에 나가지 않으면서 아군의 패배를 열망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죽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땅바닥을 구르며 애통해하고,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꼴불견의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전쟁과 모험을 겪는 동안 그들을 위험과 죽음에서 구하지 못한 채,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영웅이며,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모습의 영웅 이야기를 교육 현장에서 들려주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에 대해서조차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스 사람들은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신들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으며, 호메로스의 영웅을 용맹함과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여기며 끊임없이 대를 이어 전해주었던가?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이런 이야기가 풍미한 그리스 문명이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이야기로 대접받고 있는가?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이야기는 인류를 병들게 하는 것일 텐데, 왜 여전히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상상력의 보고로 여기고 인류의 귀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며 사랑하고 있는가?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의 눈에 이런 현상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묻다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적어도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고 말하곤 한다. 첫째는 출산이고, 둘째는 교육이다. 출산이 인간 역사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리적 조건이라면, 교육은 인간의 역사를 여타의 동물들의 역사와 다르게 하는 정신적인 조건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충분하게 낳고, 자신들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때, 즉 충분하게 교육이 이루어질 때, 인간의 역사는 의미 있게 이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는 세대교체의 양상을 띤다. 따라서 교육의 현장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만나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역사적 만남에는 보수적인 측면과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기성세대는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인류가 축적해 놓은 지식과 정보를 내놓고 전수해 주면서, 전통적인 생활과 사고의 가치를 입증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보여 주고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일차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 전수의 작업은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삶에 맞는 지식과 정보를 새롭게 찾아내는 한편, 새로운 방식의 생활과 사고를 창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과 자유를 인정하고 북돋아 주어야만 한다. 결국 교육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너희들이 가야 하며 너희들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진보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적어도 이런 진보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 나가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용기를 주며, 기성세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촉구한다. 실제로 역사의 발전은 고분고분 어른들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보다는 거침없이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도전하는 사람들과 동시대에 불화하는 창의적 실험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이런 도전 정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그리스라는 나라의 운명과는 달리, 그 자체로 서구인들에게로,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역동성을 가지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현재에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건강한 교육, 그리고 역동하는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 같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을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다. 현재 교육부 미래교육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