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행동하고, 세계를 꿈꾸다
● 글. 나은정 충청북도교육청 학교자치과 장학사
프랑스어 수업에서 세계를 만나다
필자는 20여 년 동안 충북의 한 고교에서 프랑스어라는 다소 생소한 과목의 교사였다. 외국어고도 아닌 일반계 고교에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기에는 생경한 외국어였고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학생들의 호기심과 동기를 불러오기 위해, 우선 생활 속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 학습에서부터 시작해 문화 비교 수업으로 발전시켰고 점차 관찰과 분석의 눈이 생겨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0년대부터 우리나라 대학교에 외국 유학생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에 유학 중인 프랑스나 프랑스어권 학생들이 우리 초·중고 학생들에게 자국 문화를 소개하고 함께 활동하는 문화상호이해수업(CCAP: Cross-Cultural Awareness Program)을 구안했다. 이를 교과 교육과정에 적용하면서 학생들의 관심과 안목을 트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인근 충북대학교 세네갈 출신 유학생이 필자의 프랑스어 수업에 함께하며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과 동영상을 이용해 들려줬고, 학생들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세네갈로 랜선 여행을 떠났다.
요리, 건축물, 축제 등 이국적 풍물로 시작한 활동 수업은 노예해안의 고레섬1) 이야기에 이르러 ‘제국주의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에 도달하게 됐다. 이는 아이들의 눈을 번뜩이게 했고, 노예 상인과 일제 강점기 위안부의 역사를 오버랩하며 고민을 던져줬다. 필자는 교사로서 이런 사유의 발전을 이뤄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학교생활기록부에 담으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과목 교과서의 내용을 통합, 확장시켜 생활 속에서 더 넓고 깊은 배움으로 이끄는 교육활동 작업에 매력을 느꼈다.
1) 고레섬(Île de Gorée): 세네갈 수도 다카르 동쪽 3km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노예무역의 중계지였다. 고레(Gorée)는 네덜란드어로 ‘좋은 정박지(Good rade)’라는 뜻 이며, 15세기부터 유럽 여러 나라들이 노예무역을 장악하고자 한 경쟁의 중심지였다. [출처: http://heritage.unesco.or.kr/%ea%b3%a0%eb%a0%88- %ec%84%ac/ 일부 발췌]
2014년부터 시작된 ‘일반고 역량 강화’ 사업은 각 학교별로 쏟아지는 예산을 벅차게 만들었고, 혁신교육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학교들은 기존의 방과 후 수업을 확대하고 그 수당으로 지출하곤 했다. 2015년, 당시 비담임이었던 필자는 동료 선생님들과 의기투합해, 일반고 역량 강화 사업비의 일부를 활용해 학생들과 서울 윤동주 문학관으로 떠나는 ‘역사문화 통합기행’을 진행했다. 그 후 학생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나누고자, 기행에서 느낀 점을 우리 지역사회와 비교하며 새로운 우리 지역을 상상하고 공공정책으로 제안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구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이후 서울 난개발의 현장인 종로구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에 상수도를 대주는 수돗물 가압장이 용도 폐기되자, 주민근린공원을 만들자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이를 어떻게 활용한 것인가를 두고 여러 차례의 주민토론이 있었다. 건축가 출신 구청장과 주민들은 토론 끝에, 간도 출신으로 연희전문 재학 시절 종로구 인왕산 아래 살았고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종로구민들은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지만 국내에 변변한 문학관조차 없었던 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리모델링하자고 합의했다. 대표 시 ‘자화상’에서 영감을 얻어, 기계실은 영인본으로 채워 작가 이해의 입문실이 되었고, 뒤이은 물탱크는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의 이미지를 공간으로 재현했다.
건물이나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게 된다. 근대사를 문학관에서 오롯이 느낀 학생들의 관심은 이제 우리 지역의 공간에 대한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국내 사례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도 찾아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학생 사회참여 발표회로 발전했다. 학생들의 인간 친화적 산책로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서울역 옛 고가도로가 변신한 ‘서울로’, 그 모태가 된 뉴욕 ‘하이라인 파크’, 그 전신인 파리 ‘프롬나드 플랑테’까지 탐색하며 상상력을 키워 갔다. 당시 발표회의 전문가 패널인 청주시청 도시재생팀장은 학생들의 정보력과 발랄한 제안에 고무돼 시책 반영과 시청 산하 도시재생지원센터와의 청소년 연계활동을 약속하고 이내 실천했다. 그 이듬해인 2016년 청주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지역주민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도시재생을 고민하며 연구 결과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고, 이러한 지역사회 참여활동이 알려져 그 해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중·일 초·중·고 지속가능 발전교육(ESD)’ 컨퍼런스에 한국을 대표해 우리 고교생 2명이 참가하며 그동안 진행해 온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행운도 누렸다.
시골 장학사,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꾸다
2016년 9월 지원청 장학사로 전직한 뒤, ‘괴산(槐山)’이라는 처음에는 이름도 괴상하다 생각한 읍내로 첫발을 디뎠다. ‘응답하라 1988’과 같은 1980년대 읍내 풍경, 여전히 반들반들한 살림살이와 함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식 건물 적산가옥(敵産家屋,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 옛 기와 담장이 조르륵 이어지는, 이제는 도서관이 된 조선시대 동헌터와 800년 된 느티나무 고목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괴산군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고읍(古邑)답게 장수촌이자 인구 절벽에 따른 지역 소멸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지자체와 교육청의 행복교육지구(지역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는 취지의 혁신교육지구) 업무를 맡으며 여러 마을을 속속들이 드나들게 됐고, 이는 괴산의 잠재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전국 1호 전원주택 책방이자 작은 서점 네트워크 대표 주자인 ‘숲 속 작은 책
방’, 전 세계 유명 기타리스트들이 의뢰하는 수제 기타 공방, 조선 후기 중부 지방 가옥양식을 간직한 채 70대 종손 부부가 여전히 살고 있는 김항묵 고택, 책만 꽂는 줄 알았던 도서관 책장 선반을 구증구포로 덖어낸 꽃차를 담은 유리병과 온갖 손자수로 장식한 꽃차 소믈리에, 이익보다는 토종 우리 씨앗 사수와 미래가치를 꿈꾸는 어느 농장, 연풍 현감이었던 단원 김홍도의 화폭이었을 한지를 3대째 뜨는 장인,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보자고 동네 엄마들이 마음을 모아 시작한 칠성면 소재 1호 청소년 카페 ‘BOOKDO칠성’에 이어 읍내의 100년 된 교회 공간을 얻어 차린 2호 청소년 카페 ‘어스’ 등 업무 담당자로서 신이나 지역의 크고 작은 배움터를 학교 안팎과 연결하고자 했다.
숨어있는 보석과 같던 지역자원들은 ‘교육의 힘으로 행복한 세상의 가능성을 펼쳐보리라’는 장학사로서의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우선 괴산군 내 그동안 귀농·귀촌 인구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운영되던 각종 보육 및 교육 프로그램과 작은 박물관, 도서관, 향교 등 교육문화자원으로 ‘괴산 행복교육자원 지도’를 만들고, 권역별 마을학교를 4개 구축해 2년 담당 기간 동안 무학년으로 120여 개의 프로그램이 구동됐다. 필자에겐 아직 연마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같은 괴산의 많은 교육문화자원들이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고 관심 없는 일상이라는 점이 충격이었고 안타까워 고민을 거듭했다.
탈고향이 꿈인 아이들,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다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전혀 없는 아이들은 대개 대도시나 소위 선진국으로의 이주 정착이 장래희망이었다.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눈으로 자기 마을을 발견하게 해주고 싶던 차, 2017년 가을에 지인을 통해 대전외국어고등학교와 협정을 맺은 프랑스 보르도의 한국어를 배우는 고교생들이 교류학습을 온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이에 담당사업의 예산 일부를 활용해 우리 괴산 학생들과 ‘프랑스인과 함께하는 우리 마을 문화예술체험’ 교류를 기획했다. 전교생 60여 명의 작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말의 원어민 화자로서, 한국어 초보 학습자인 프랑스 고교생들에게 마을을 소개하고, 사물놀이도 알려주고, 괴산의 명물인 절임배추로 김장도 담가 마을 요양원 어르신들께 기부하는 등 일련의 의미 있는 활동을 하루 동안 함께했다. 괴산 학생들에게는 흔한 시골 논두렁길과 산속 꼬부랑 도로가 프랑스 아이들에게는 몽환적인 한 폭의 동양화였고, 우리 학생들로서는 자신들이 작은 학교에서 온갖 혜택을 누려왔다는 것, 그리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이 교류 프로그램 후 한 학생은 “‘유기농 괴산’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싶고, 친환경 농업과 공정여행 등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보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프랑스 학생들의 괴산 탐방 후, 괴산군청은 괴산군 내 고교 1년생 전원을 위해 야심차게 4개국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미국, 호주, 중국, 프랑스 중 1개국을 선택해 약 2주 동안 현지 체험학습을 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를 선택한 20여 명의 학생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을 보낸 소도시 블르와(Blois)에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홈스테이 가족과 정원을 가꾸거나 프랑스 친구들과 피크닉을 하는 등 프랑스식 느리게 사는 삶을 만끽하며 역사와 전통이 빚어낸 문화를 맛봤다. 막연히 파리와 에펠탑으로 대변되던 프랑스의 이름도 모르던 도시 블르와에서 보낸 시간이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귀국 후 몇 달에 걸쳐 회자되곤 했다. 한편 블르와 사람들에게도 괴산의 작은 학교들과 마을이 함께 이뤄가는 배움과 삶의 이야기가 신기했나 보다.
괴산 아이들과의 교류 이후 틈틈이 괴산군청 홈페이지를 살피며 정보를 모으던 블르와 한글학교 아이들 20여 명은 2019년 봄, 부활절 휴가 때 일주일간 괴산 체험학습에 참여했다. 세계화와 자본의 흐름에 밀려 프랑스도 잃어가고 있는 공동체 문화를 지켜나가는 괴산을 보며, 한국어 학습자로서 한국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전교생이 20명도 채 되지 않는 송면중학교 탐방과 공정여행에 감사를 표하려 마을 주민들이 손수 마련한 진달래꽃 화전으로 시작한 마을잔치로 송면리는 블르와를 맞이했다. 약 5박 6일 간 괴산 아이들, 학부모들과 함께 꽃차 소믈리에의 한식 다과와 꽃차 덖기, 숲 속 작은 책방의 시골 문화센터로서의 귀촌 이야기와 낭독회, 농장에서 우리 떡과 김치 담그기, 토요일마다 열리는 유기농 농부시장 등 괴산행복교육지구의 마을 배움터를 엮은 공정여행으로 블르와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차게 익혔다. 그 이듬해에는 괴산 학생들이 부르고뉴의 고도(古都) 디종(Dijon)으로 교류학습을 다녀왔고, 디종에서도 조금 과장하자면 부산, 울산보다 훨씬 유명한 ‘괴산’을 남기고 왔다 한다. 지금도 블르와 아이들과 괴산 아이들은 SNS로 활발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로컬이 미래다! 지역을 아는 교육을 향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미래가 더욱 불확실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이 바뀐다고들 한다. 구성원 각자의 요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변수가 수없이 돌출하는 사회에서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하는 힘이 아닐까 한다.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논의와 협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와 마을, 지역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병행된다면,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고 지역에서 세계의 문제를 읽고 해답을 찾아갈 수도 있으리라 본다.
이를 위해, 작은 노력으로도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과서의 지식을 학생들의 삶과 연결하는 새로운 배움을 조직해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교육과정 재구성-수업 혁신-평가 혁신-기록의 메커니즘 속에서, 학생들의 삶이 펼쳐지는 지역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충분히 배려하고 감안해, 지역화교육과정을 구축해 가야 한다. 서울부터 마라도까지 모든 과목을 똑같은 교과서의 내용으로 배우는 것이 누구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 간 마을 교육과정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 초·중·고 연계 프로젝트 학습을 통한 클러스트 구축이 가능하며, 지역의 장인 또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멘토로 삼은 학생-학부모(또는 주민) 프로젝트 학습, 나아가 고교학점제로의 연계등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지역 지자체는 인구 소멸을 절감하는 바, 젊은 인구들이 지역에 남아 미래 먹거리로 삼을 만한 분야를 창출해야 하되, 그 방향이 대량화, 속도화가 아닌 지속가능한 것이길 희망한다. 그 흔한 국제 교류가 그저 한국의 야간 쇼핑, K-POP 쇼핑이나 일제식(一齊式) 대형관광버스 관광이 아니라, 한국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과 마을의 자원과 교류하며 상생하는 지속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필자는 괴산의 마을교육자원들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한국어를 학습하는 외국인들, 해외 한글학교 학생들에게는 ‘만남’과 ‘대화’가 있는 일상의 한국을 발견하는 것이 큰 기쁨일 것이다.
셋째, 학교와 마을의 공존을 위해 지자체와의 협력이 항상 뒷받침돼야 한다. 교육청은 지자체와 상시 협의체를 구성해 정기적 간담회로 지역 아젠다를 찾고, 학교와 지역 현장의 요구와 수요를 해결하려 상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자체 관계자들과의 정기 교류는 그들의 교육적 성찰력을 높일 것이고, 나아가 협력적 파트너십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지역에서 행동하고, 세계를 꿈꾸다
● 글. 나은정 충청북도교육청 학교자치과 장학사
프랑스어 수업에서 세계를 만나다
필자는 20여 년 동안 충북의 한 고교에서 프랑스어라는 다소 생소한 과목의 교사였다. 외국어고도 아닌 일반계 고교에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기에는 생경한 외국어였고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학생들의 호기심과 동기를 불러오기 위해, 우선 생활 속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 학습에서부터 시작해 문화 비교 수업으로 발전시켰고 점차 관찰과 분석의 눈이 생겨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0년대부터 우리나라 대학교에 외국 유학생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에 유학 중인 프랑스나 프랑스어권 학생들이 우리 초·중고 학생들에게 자국 문화를 소개하고 함께 활동하는 문화상호이해수업(CCAP: Cross-Cultural Awareness Program)을 구안했다. 이를 교과 교육과정에 적용하면서 학생들의 관심과 안목을 트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인근 충북대학교 세네갈 출신 유학생이 필자의 프랑스어 수업에 함께하며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과 동영상을 이용해 들려줬고, 학생들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세네갈로 랜선 여행을 떠났다.
요리, 건축물, 축제 등 이국적 풍물로 시작한 활동 수업은 노예해안의 고레섬1) 이야기에 이르러 ‘제국주의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에 도달하게 됐다. 이는 아이들의 눈을 번뜩이게 했고, 노예 상인과 일제 강점기 위안부의 역사를 오버랩하며 고민을 던져줬다. 필자는 교사로서 이런 사유의 발전을 이뤄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학교생활기록부에 담으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과목 교과서의 내용을 통합, 확장시켜 생활 속에서 더 넓고 깊은 배움으로 이끄는 교육활동 작업에 매력을 느꼈다.
1) 고레섬(Île de Gorée): 세네갈 수도 다카르 동쪽 3km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노예무역의 중계지였다. 고레(Gorée)는 네덜란드어로 ‘좋은 정박지(Good rade)’라는 뜻 이며, 15세기부터 유럽 여러 나라들이 노예무역을 장악하고자 한 경쟁의 중심지였다. [출처: http://heritage.unesco.or.kr/%ea%b3%a0%eb%a0%88- %ec%84%ac/ 일부 발췌]
2014년부터 시작된 ‘일반고 역량 강화’ 사업은 각 학교별로 쏟아지는 예산을 벅차게 만들었고, 혁신교육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학교들은 기존의 방과 후 수업을 확대하고 그 수당으로 지출하곤 했다. 2015년, 당시 비담임이었던 필자는 동료 선생님들과 의기투합해, 일반고 역량 강화 사업비의 일부를 활용해 학생들과 서울 윤동주 문학관으로 떠나는 ‘역사문화 통합기행’을 진행했다. 그 후 학생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나누고자, 기행에서 느낀 점을 우리 지역사회와 비교하며 새로운 우리 지역을 상상하고 공공정책으로 제안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구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이후 서울 난개발의 현장인 종로구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에 상수도를 대주는 수돗물 가압장이 용도 폐기되자, 주민근린공원을 만들자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이를 어떻게 활용한 것인가를 두고 여러 차례의 주민토론이 있었다. 건축가 출신 구청장과 주민들은 토론 끝에, 간도 출신으로 연희전문 재학 시절 종로구 인왕산 아래 살았고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종로구민들은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지만 국내에 변변한 문학관조차 없었던 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리모델링하자고 합의했다. 대표 시 ‘자화상’에서 영감을 얻어, 기계실은 영인본으로 채워 작가 이해의 입문실이 되었고, 뒤이은 물탱크는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의 이미지를 공간으로 재현했다.
건물이나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게 된다. 근대사를 문학관에서 오롯이 느낀 학생들의 관심은 이제 우리 지역의 공간에 대한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국내 사례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도 찾아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학생 사회참여 발표회로 발전했다. 학생들의 인간 친화적 산책로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서울역 옛 고가도로가 변신한 ‘서울로’, 그 모태가 된 뉴욕 ‘하이라인 파크’, 그 전신인 파리 ‘프롬나드 플랑테’까지 탐색하며 상상력을 키워 갔다. 당시 발표회의 전문가 패널인 청주시청 도시재생팀장은 학생들의 정보력과 발랄한 제안에 고무돼 시책 반영과 시청 산하 도시재생지원센터와의 청소년 연계활동을 약속하고 이내 실천했다. 그 이듬해인 2016년 청주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지역주민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도시재생을 고민하며 연구 결과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고, 이러한 지역사회 참여활동이 알려져 그 해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중·일 초·중·고 지속가능 발전교육(ESD)’ 컨퍼런스에 한국을 대표해 우리 고교생 2명이 참가하며 그동안 진행해 온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행운도 누렸다.
시골 장학사,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꾸다
2016년 9월 지원청 장학사로 전직한 뒤, ‘괴산(槐山)’이라는 처음에는 이름도 괴상하다 생각한 읍내로 첫발을 디뎠다. ‘응답하라 1988’과 같은 1980년대 읍내 풍경, 여전히 반들반들한 살림살이와 함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식 건물 적산가옥(敵産家屋,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 옛 기와 담장이 조르륵 이어지는, 이제는 도서관이 된 조선시대 동헌터와 800년 된 느티나무 고목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괴산군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고읍(古邑)답게 장수촌이자 인구 절벽에 따른 지역 소멸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지자체와 교육청의 행복교육지구(지역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는 취지의 혁신교육지구) 업무를 맡으며 여러 마을을 속속들이 드나들게 됐고, 이는 괴산의 잠재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전국 1호 전원주택 책방이자 작은 서점 네트워크 대표 주자인 ‘숲 속 작은 책
방’, 전 세계 유명 기타리스트들이 의뢰하는 수제 기타 공방, 조선 후기 중부 지방 가옥양식을 간직한 채 70대 종손 부부가 여전히 살고 있는 김항묵 고택, 책만 꽂는 줄 알았던 도서관 책장 선반을 구증구포로 덖어낸 꽃차를 담은 유리병과 온갖 손자수로 장식한 꽃차 소믈리에, 이익보다는 토종 우리 씨앗 사수와 미래가치를 꿈꾸는 어느 농장, 연풍 현감이었던 단원 김홍도의 화폭이었을 한지를 3대째 뜨는 장인,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보자고 동네 엄마들이 마음을 모아 시작한 칠성면 소재 1호 청소년 카페 ‘BOOKDO칠성’에 이어 읍내의 100년 된 교회 공간을 얻어 차린 2호 청소년 카페 ‘어스’ 등 업무 담당자로서 신이나 지역의 크고 작은 배움터를 학교 안팎과 연결하고자 했다.
숨어있는 보석과 같던 지역자원들은 ‘교육의 힘으로 행복한 세상의 가능성을 펼쳐보리라’는 장학사로서의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우선 괴산군 내 그동안 귀농·귀촌 인구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운영되던 각종 보육 및 교육 프로그램과 작은 박물관, 도서관, 향교 등 교육문화자원으로 ‘괴산 행복교육자원 지도’를 만들고, 권역별 마을학교를 4개 구축해 2년 담당 기간 동안 무학년으로 120여 개의 프로그램이 구동됐다. 필자에겐 아직 연마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같은 괴산의 많은 교육문화자원들이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고 관심 없는 일상이라는 점이 충격이었고 안타까워 고민을 거듭했다.
탈고향이 꿈인 아이들,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다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전혀 없는 아이들은 대개 대도시나 소위 선진국으로의 이주 정착이 장래희망이었다.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눈으로 자기 마을을 발견하게 해주고 싶던 차, 2017년 가을에 지인을 통해 대전외국어고등학교와 협정을 맺은 프랑스 보르도의 한국어를 배우는 고교생들이 교류학습을 온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이에 담당사업의 예산 일부를 활용해 우리 괴산 학생들과 ‘프랑스인과 함께하는 우리 마을 문화예술체험’ 교류를 기획했다. 전교생 60여 명의 작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말의 원어민 화자로서, 한국어 초보 학습자인 프랑스 고교생들에게 마을을 소개하고, 사물놀이도 알려주고, 괴산의 명물인 절임배추로 김장도 담가 마을 요양원 어르신들께 기부하는 등 일련의 의미 있는 활동을 하루 동안 함께했다. 괴산 학생들에게는 흔한 시골 논두렁길과 산속 꼬부랑 도로가 프랑스 아이들에게는 몽환적인 한 폭의 동양화였고, 우리 학생들로서는 자신들이 작은 학교에서 온갖 혜택을 누려왔다는 것, 그리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이 교류 프로그램 후 한 학생은 “‘유기농 괴산’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싶고, 친환경 농업과 공정여행 등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보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프랑스 학생들의 괴산 탐방 후, 괴산군청은 괴산군 내 고교 1년생 전원을 위해 야심차게 4개국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미국, 호주, 중국, 프랑스 중 1개국을 선택해 약 2주 동안 현지 체험학습을 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를 선택한 20여 명의 학생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을 보낸 소도시 블르와(Blois)에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홈스테이 가족과 정원을 가꾸거나 프랑스 친구들과 피크닉을 하는 등 프랑스식 느리게 사는 삶을 만끽하며 역사와 전통이 빚어낸 문화를 맛봤다. 막연히 파리와 에펠탑으로 대변되던 프랑스의 이름도 모르던 도시 블르와에서 보낸 시간이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귀국 후 몇 달에 걸쳐 회자되곤 했다. 한편 블르와 사람들에게도 괴산의 작은 학교들과 마을이 함께 이뤄가는 배움과 삶의 이야기가 신기했나 보다.
괴산 아이들과의 교류 이후 틈틈이 괴산군청 홈페이지를 살피며 정보를 모으던 블르와 한글학교 아이들 20여 명은 2019년 봄, 부활절 휴가 때 일주일간 괴산 체험학습에 참여했다. 세계화와 자본의 흐름에 밀려 프랑스도 잃어가고 있는 공동체 문화를 지켜나가는 괴산을 보며, 한국어 학습자로서 한국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전교생이 20명도 채 되지 않는 송면중학교 탐방과 공정여행에 감사를 표하려 마을 주민들이 손수 마련한 진달래꽃 화전으로 시작한 마을잔치로 송면리는 블르와를 맞이했다. 약 5박 6일 간 괴산 아이들, 학부모들과 함께 꽃차 소믈리에의 한식 다과와 꽃차 덖기, 숲 속 작은 책방의 시골 문화센터로서의 귀촌 이야기와 낭독회, 농장에서 우리 떡과 김치 담그기, 토요일마다 열리는 유기농 농부시장 등 괴산행복교육지구의 마을 배움터를 엮은 공정여행으로 블르와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차게 익혔다. 그 이듬해에는 괴산 학생들이 부르고뉴의 고도(古都) 디종(Dijon)으로 교류학습을 다녀왔고, 디종에서도 조금 과장하자면 부산, 울산보다 훨씬 유명한 ‘괴산’을 남기고 왔다 한다. 지금도 블르와 아이들과 괴산 아이들은 SNS로 활발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로컬이 미래다! 지역을 아는 교육을 향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미래가 더욱 불확실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이 바뀐다고들 한다. 구성원 각자의 요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변수가 수없이 돌출하는 사회에서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하는 힘이 아닐까 한다.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논의와 협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와 마을, 지역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병행된다면,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고 지역에서 세계의 문제를 읽고 해답을 찾아갈 수도 있으리라 본다.
이를 위해, 작은 노력으로도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과서의 지식을 학생들의 삶과 연결하는 새로운 배움을 조직해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교육과정 재구성-수업 혁신-평가 혁신-기록의 메커니즘 속에서, 학생들의 삶이 펼쳐지는 지역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충분히 배려하고 감안해, 지역화교육과정을 구축해 가야 한다. 서울부터 마라도까지 모든 과목을 똑같은 교과서의 내용으로 배우는 것이 누구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 간 마을 교육과정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 초·중·고 연계 프로젝트 학습을 통한 클러스트 구축이 가능하며, 지역의 장인 또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멘토로 삼은 학생-학부모(또는 주민) 프로젝트 학습, 나아가 고교학점제로의 연계등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지역 지자체는 인구 소멸을 절감하는 바, 젊은 인구들이 지역에 남아 미래 먹거리로 삼을 만한 분야를 창출해야 하되, 그 방향이 대량화, 속도화가 아닌 지속가능한 것이길 희망한다. 그 흔한 국제 교류가 그저 한국의 야간 쇼핑, K-POP 쇼핑이나 일제식(一齊式) 대형관광버스 관광이 아니라, 한국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과 마을의 자원과 교류하며 상생하는 지속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필자는 괴산의 마을교육자원들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한국어를 학습하는 외국인들, 해외 한글학교 학생들에게는 ‘만남’과 ‘대화’가 있는 일상의 한국을 발견하는 것이 큰 기쁨일 것이다.
셋째, 학교와 마을의 공존을 위해 지자체와의 협력이 항상 뒷받침돼야 한다. 교육청은 지자체와 상시 협의체를 구성해 정기적 간담회로 지역 아젠다를 찾고, 학교와 지역 현장의 요구와 수요를 해결하려 상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자체 관계자들과의 정기 교류는 그들의 교육적 성찰력을 높일 것이고, 나아가 협력적 파트너십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