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개정 교육과정에
교양과목 ‘철학’이 주는 희망

글.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 철학박사

교육은 미래에 필요한 가치관을 길러주고 있을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근대 물리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수학과 역학에 해박했던 그도 주식 투자에서 만큼은 크게 실패했다.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狂氣)는 계산하지 못한다.”고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교육자라면 이러한 뉴턴의 한탄을 곳곳에서 내뱉을지 모르겠다.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지혜가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으로 이어지지 않는 탓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해 온 길은 설명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낳을 영향은 가늠하기 어렵다. 예컨대 2007년에 처음 등장한 스마트폰은 농업을 인류에게 가져다준 신석기 혁명만큼이나 큰 변화를 낳았다. 이제는 가상 세계가 현실보다 중요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려 보라. 웹(web)에서 SNS로 맺은 사이를 실제 만남으로 다져진 관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과거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쌓여가니, 책임의 범위와 의미 또한 달라져 간다. 어디나 연락이 닿는 덕분에 국경의 의미도 예전 같지 않으며, 블록체인 기술은 ‘화폐는 국가만 찍어내고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당연했던 상식마저 흔들고 있다. 이렇듯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사회 곳곳에서 혼란을 낳고 있다. 생명 공학의 발전에 따른 유전자 조작 논란은 고전적인 문제로 보일 정도다.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K-방역은 실은 ‘개인의 행동을 국가가 추적하고 통제해도 되는가.’라는 문제를 감추고 있으며, 인터넷 특유의 무리 짓기 문화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갈등과 혐오를 격렬하게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해법을 내놓아야 할까? 지금의 인류 문명은 웃자라는 몸만큼 지혜가 자라나지 못한 사춘기 청소년의 모양새다. 발전하는 문명에는 이에 걸맞은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과정은 과연 후속 세대들에게 미래 사회에 필요한 세계관을 길러주고 있을까?

문명 진보를 이끄는 철학의 발전

구한말, 성리학에 매달리던 지도층은 조선이 문명을 개화 하지 못하도록 뒷다리를 잡았다. 서양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인류 역사에는 이렇듯 낡은 가치관이 발전을 막는 족쇄가 된 경우가 수없이 많다. 새로운 철학의 발명은 과학 기술의 진보만큼이나 인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판단의 틀을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지식의 기준을 신(神)에서 인간으로 옮겨놓은 데카르트의 사상이 없었다면, 과연 과학 문명이 지금처럼 온전히 자라날 수 있었을까? 인간 이성의 한계를 밝혀 과학이 신앙과 도덕의 영역을 넘볼 수 없음을 증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없었다면 과학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으로 본 헤겔의 철학이 문명사회에 녹아들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뿌리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철학의 가치를 깨닫기는 어렵다.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공기와 같기 때문이다. 무척 중요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다. 철학자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를 진단하고 끊임없이 대안을 내놓는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지금의 인간은 “석기시대의 마음, 중세시대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을 갖고 살아간다.” 사회 곳곳에서 윤리와 제도가 ‘신과 같은 기술’과 부딪히는 현실을 일컫는 표현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과 발전하는 기술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해결할 ‘철학의 영웅’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과정은 미래 사회에 간절하게 필요한 인문학 인재를 키워내고 있을까?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은 우리 교육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학생 스스로 자연적인 발달로 다다르는 곳과, 이에 기초를 두고 교육을 통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준의 차이를 일컫는다. 교육은 당연히 혼자서 익힐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학생들이 나아가게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교육자들은 학생의 발달 수준에 맞게 학습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게 학생들을 이끈다.


교육은 혼자서 학생들이
나아가게 할 때만 의미가 있어,
교육자들은 학생의 발달 수준에 맞게
학습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게
학생들을 이끈다.

하지만 우리는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을 이제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듯싶다. 이미 자리 잡은 지식 가운데 상당수는 미래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잘 정돈된 지식 교육을 통해 자연적인 발전 수준을 넘어 깨닫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필요 없는 시대에 뒤처진 내용이 몸과 두뇌에 잘 스며든 상태를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오히려 퇴보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교육과정의 허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어, 수학, 영어 등 도구과목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의 소지가 없는 지식을 학생들이 잘 습득하도록 하는 데 방점을 둔다. 적어도 국가수준교육과정에서 교수요목이 될 정도라면 충분히 검증된 지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꼭 필요로 하지만, 현재로서는 충분히 정리되지 않는 이론이 있다면 어떨까? 당연히 교육과정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민주시민교육’과 같이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항목들도 상황은 별다르지 않다. 사회과 과목들에는 민주주의의 뜻과 절차를 설명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교과마다 이를 학생들이 잘 훈습(熏習)하게 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제나 도전에 부딪히며 늘 새로워지는 개념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우리가 좇아야 할 롤 모델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쪽의 편중되는 것 보다 더 나은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수준이 되었다. 한마디로 검증된 지식을 넘어서는 독창성과 상상력,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정규교육과정에서는 이런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교육과정이 미래에 꼭 필요한 도전에 요구되는 역량을 키울 가능성은 없을까? 필자는 고등학교 교양 과목군에서 해답을 찾고 싶다.

교양 과목군, 기존의 틀을 넘는 시도가 가능한 영역

지금의 고등학교 교양 과목군의 교과들은 성취도와 석차를 내지 않는다. 그만큼 수업 운영의 재량권도 크다. 게다가 교양 과목군에 있는 철학, 논리학, 심리학 등의 과목들은 사범대에 관련 학과가 없다. 언뜻 보면 교과의 처지가 불안해 보이지만, 장점도 크다. 새로운 발상과 내용이 숱하게 많은 교육전문가 손을 거치며 스러질 가능성 또한 적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2022 개정교육과정 논의는 사범대학의 교사양성체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도 참여가능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교육청은 사회가 요구하고 교육현장에서 필요로 한다면 새로운 교양과목을 창의적으로 개설하도록 권장하고 있기도 하다. 교양 과목군에서는 기존의 교육과정 틀에서는 해보기 어려웠던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키우는 교육을 시도할만한 여건이 충분한 셈이다. 교양 과목군 중에서도 ‘철학’은 단연 돋보이는 과목이다. 아마도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교과 가운데, 철학은 유일하게 학생들에게 기존의 판을 깨는 생각을 허용하는 과목일 듯싶다. 철학적 사유는 도덕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초(超) 도덕적 수준까지 물음을 이끌어 간다. 예컨대, “왜 학교는 다녀야 하는가?”, “경제는 꼭 성장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은 철학 시간에 언제나 묻고 따지는 주요 주제들이다. 이는 상식이 편견으로 바뀌기 전에 문제를 깨닫고 시대 변화에 맞게 새로운 가치관을 만드는 노력으로 학생들을 이끈다. 이는 더 좋은 세계관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히 교육적이다. 데카르트 역시 문명의 기초가 되는 확실한 지식을 찾는 ‘방법’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의심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교육과정 개정 논의에서는 인공지능과 제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주요 쟁점이다. 그러나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따지기에 앞서, ‘왜 그래야 하는가?’부터 묻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판을 깨는, 시대를 이끄는 생각은 가장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물음을 던질 때 열리는 까닭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바람직한가?”, “어떤 사회가 최선이라 할 만한가?” 등의 물음을 원점에서부터 따지는 철학 시간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일상에서는 현실의 가치관을
튼실히 따르면서도 철학 시간만큼은
생각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학생의 철학자 되어 보기’가 필요하다

인류는 이미 평균 수명 100세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공간의 제한은 사라지고 있으며, 기록 수단의 발전은 시간을 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이며 공정하고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를 과거의 잣대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시대이기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여는 위대한 현자(賢者)가 갑자기 나타나는 법은 없다. 위대한 발견들은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시도가 거듭되는 가운데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학생의 철학자 되어 보기’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려움 없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독창성, 상상력,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실천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있다면, 나아가 일상에서는 현실의 가치관을 튼실히 따르면서도 철학 시간만큼은 생각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는 미래 사회를 이끌 가치관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역량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은 시대 정신을 세울 인재를 길러야 한다

2022 개정교육과정을 만드는 논의가 한창인 요즘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은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를 잘 잡아내어 반영하는 듯싶다. ‘혁신적 포용 인재’라는 기치 아래, ‘주도성 책임감’, ‘배려와 포용’, ‘문제해결융합’, 그리고 ‘창의 혁신’이라는 역량을 제시한 개정교육과정의 인재상(안)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한다.’는 식의 개발도상국 시절의 관성이 여전히 엿보여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우리는 더이상 발전한 나라들을 따라잡아야 할 추격자의 처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인류사회에 새로운 가치와 발전방향을 열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할 선진국이다. ‘창의 혁신’ 이라는 표현 아래 담을 내용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남다른 해법을 내놓는다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미래 사회의 시대정신을 만들 인재를 만든다는 의지가 담겨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 수준에 걸맞은 교육과정이라면 이 정도 결기는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교양 과목군, 그 가운데서도 철학 교과의 가치는 돋보인다. 아무쪼록 지금의 교육과정 개정 논의가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갖춘 인재를 기르는 데 최적화된 모습으로 결실 맺기를 기대해 본다.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등 20여 권의 대중 인문서와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천재교육)’ 등을 집필했다. 교사 및 학생 대상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철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교양과목 ‘철학’이 주는 희망

글.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 철학박사

교육은 미래에 필요한 가치관을 길러주고 있을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근대 물리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수학과 역학에 해박했던 그도 주식 투자에서 만큼은 크게 실패했다.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狂氣)는 계산하지 못한다.”고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교육자라면 이러한 뉴턴의 한탄을 곳곳에서 내뱉을지 모르겠다.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지혜가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으로 이어지지 않는 탓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해 온 길은 설명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낳을 영향은 가늠하기 어렵다. 예컨대 2007년에 처음 등장한 스마트폰은 농업을 인류에게 가져다준 신석기 혁명만큼이나 큰 변화를 낳았다. 이제는 가상 세계가 현실보다 중요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려 보라. 웹(web)에서 SNS로 맺은 사이를 실제 만남으로 다져진 관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과거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쌓여가니, 책임의 범위와 의미 또한 달라져 간다. 어디나 연락이 닿는 덕분에 국경의 의미도 예전 같지 않으며, 블록체인 기술은 ‘화폐는 국가만 찍어내고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당연했던 상식마저 흔들고 있다. 이렇듯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사회 곳곳에서 혼란을 낳고 있다. 생명 공학의 발전에 따른 유전자 조작 논란은 고전적인 문제로 보일 정도다.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K-방역은 실은 ‘개인의 행동을 국가가 추적하고 통제해도 되는가.’라는 문제를 감추고 있으며, 인터넷 특유의 무리 짓기 문화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갈등과 혐오를 격렬하게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해법을 내놓아야 할까? 지금의 인류 문명은 웃자라는 몸만큼 지혜가 자라나지 못한 사춘기 청소년의 모양새다. 발전하는 문명에는 이에 걸맞은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과정은 과연 후속 세대들에게 미래 사회에 필요한 세계관을 길러주고 있을까?

문명 진보를 이끄는 철학의 발전

구한말, 성리학에 매달리던 지도층은 조선이 문명을 개화 하지 못하도록 뒷다리를 잡았다. 서양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인류 역사에는 이렇듯 낡은 가치관이 발전을 막는 족쇄가 된 경우가 수없이 많다. 새로운 철학의 발명은 과학 기술의 진보만큼이나 인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판단의 틀을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지식의 기준을 신(神)에서 인간으로 옮겨놓은 데카르트의 사상이 없었다면, 과연 과학 문명이 지금처럼 온전히 자라날 수 있었을까? 인간 이성의 한계를 밝혀 과학이 신앙과 도덕의 영역을 넘볼 수 없음을 증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없었다면 과학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으로 본 헤겔의 철학이 문명사회에 녹아들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뿌리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철학의 가치를 깨닫기는 어렵다.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공기와 같기 때문이다. 무척 중요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다. 철학자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를 진단하고 끊임없이 대안을 내놓는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지금의 인간은 “석기시대의 마음, 중세시대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을 갖고 살아간다.” 사회 곳곳에서 윤리와 제도가 ‘신과 같은 기술’과 부딪히는 현실을 일컫는 표현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과 발전하는 기술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해결할 ‘철학의 영웅’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과정은 미래 사회에 간절하게 필요한 인문학 인재를 키워내고 있을까?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은 우리 교육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학생 스스로 자연적인 발달로 다다르는 곳과, 이에 기초를 두고 교육을 통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준의 차이를 일컫는다. 교육은 당연히 혼자서 익힐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학생들이 나아가게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교육자들은 학생의 발달 수준에 맞게 학습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게 학생들을 이끈다.


교육은 혼자서 학생들이
나아가게 할 때만 의미가 있어,
교육자들은 학생의 발달 수준에 맞게
학습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게
학생들을 이끈다.

하지만 우리는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을 이제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듯싶다. 이미 자리 잡은 지식 가운데 상당수는 미래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잘 정돈된 지식 교육을 통해 자연적인 발전 수준을 넘어 깨닫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필요 없는 시대에 뒤처진 내용이 몸과 두뇌에 잘 스며든 상태를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오히려 퇴보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교육과정의 허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어, 수학, 영어 등 도구과목은 이미 잘 알려진 논란의 소지가 없는 지식을 학생들이 잘 습득하도록 하는 데 방점을 둔다. 적어도 국가수준교육과정에서 교수요목이 될 정도라면 충분히 검증된 지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꼭 필요로 하지만, 현재로서는 충분히 정리되지 않는 이론이 있다면 어떨까? 당연히 교육과정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민주시민교육’과 같이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항목들도 상황은 별다르지 않다. 사회과 과목들에는 민주주의의 뜻과 절차를 설명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교과마다 이를 학생들이 잘 훈습(熏習)하게 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제나 도전에 부딪히며 늘 새로워지는 개념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우리가 좇아야 할 롤 모델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쪽의 편중되는 것 보다 더 나은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수준이 되었다. 한마디로 검증된 지식을 넘어서는 독창성과 상상력,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정규교육과정에서는 이런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교육과정이 미래에 꼭 필요한 도전에 요구되는 역량을 키울 가능성은 없을까? 필자는 고등학교 교양 과목군에서 해답을 찾고 싶다.

교양 과목군, 기존의 틀을 넘는 시도가 가능한 영역

지금의 고등학교 교양 과목군의 교과들은 성취도와 석차를 내지 않는다. 그만큼 수업 운영의 재량권도 크다. 게다가 교양 과목군에 있는 철학, 논리학, 심리학 등의 과목들은 사범대에 관련 학과가 없다. 언뜻 보면 교과의 처지가 불안해 보이지만, 장점도 크다. 새로운 발상과 내용이 숱하게 많은 교육전문가 손을 거치며 스러질 가능성 또한 적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현실의 가치관을
튼실히 따르면서도 철학 시간만큼은
생각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2022 개정교육과정 논의는 사범대학의 교사양성체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도 참여가능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교육청은 사회가 요구하고 교육현장에서 필요로 한다면 새로운 교양과목을 창의적으로 개설하도록 권장하고 있기도 하다. 교양 과목군에서는 기존의 교육과정 틀에서는 해보기 어려웠던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키우는 교육을 시도할만한 여건이 충분한 셈이다. 교양 과목군 중에서도 ‘철학’은 단연 돋보이는 과목이다. 아마도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교과 가운데, 철학은 유일하게 학생들에게 기존의 판을 깨는 생각을 허용하는 과목일 듯싶다. 철학적 사유는 도덕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초(超) 도덕적 수준까지 물음을 이끌어 간다. 예컨대, “왜 학교는 다녀야 하는가?”, “경제는 꼭 성장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은 철학 시간에 언제나 묻고 따지는 주요 주제들이다. 이는 상식이 편견으로 바뀌기 전에 문제를 깨닫고 시대 변화에 맞게 새로운 가치관을 만드는 노력으로 학생들을 이끈다. 이는 더 좋은 세계관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히 교육적이다. 데카르트 역시 문명의 기초가 되는 확실한 지식을 찾는 ‘방법’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의심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교육과정 개정 논의에서는 인공지능과 제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주요 쟁점이다. 그러나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따지기에 앞서, ‘왜 그래야 하는가?’부터 묻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판을 깨는, 시대를 이끄는 생각은 가장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물음을 던질 때 열리는 까닭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바람직한가?”, “어떤 사회가 최선이라 할 만한가?” 등의 물음을 원점에서부터 따지는 철학 시간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모든 학생의 철학자 되어 보기’가 필요하다

인류는 이미 평균 수명 100세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공간의 제한은 사라지고 있으며, 기록 수단의 발전은 시간을 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이며 공정하고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를 과거의 잣대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시대이기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여는 위대한 현자(賢者)가 갑자기 나타나는 법은 없다. 위대한 발견들은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시도가 거듭되는 가운데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학생의 철학자 되어 보기’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려움 없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독창성, 상상력,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실천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있다면, 나아가 일상에서는 현실의 가치관을 튼실히 따르면서도 철학 시간만큼은 생각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는 미래 사회를 이끌 가치관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역량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은 시대 정신을 세울 인재를 길러야 한다

2022 개정교육과정을 만드는 논의가 한창인 요즘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은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를 잘 잡아내어 반영하는 듯싶다. ‘혁신적 포용 인재’라는 기치 아래, ‘주도성 책임감’, ‘배려와 포용’, ‘문제해결융합’, 그리고 ‘창의 혁신’이라는 역량을 제시한 개정교육과정의 인재상(안)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한다.’는 식의 개발도상국 시절의 관성이 여전히 엿보여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우리는 더이상 발전한 나라들을 따라잡아야 할 추격자의 처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인류사회에 새로운 가치와 발전방향을 열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할 선진국이다. ‘창의 혁신’ 이라는 표현 아래 담을 내용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남다른 해법을 내놓는다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미래 사회의 시대정신을 만들 인재를 만든다는 의지가 담겨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 수준에 걸맞은 교육과정이라면 이 정도 결기는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교양 과목군, 그 가운데서도 철학 교과의 가치는 돋보인다. 아무쪼록 지금의 교육과정 개정 논의가 독창성과 상상력,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갖춘 인재를 기르는 데 최적화된 모습으로 결실 맺기를 기대해 본다.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등 20여 권의 대중 인문서와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천재교육)’ 등을 집필했다. 교사 및 학생 대상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철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