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 가득했던 정조를 만나는 역사여행
수원 ‘화성행궁’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몇 번을 둘러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특히 수원화성의 꽃, 화성행궁은 놓치면 후회할 최고의 명소로 꼽힌다. 조선 후기 국운을 되살리려 했던 정조는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축조를 계기로 나라의 재도약을 꾀했다. 정조의 정신이 곳곳에 스며있는 화성행궁으로 전은희·이켄나 모자가 의미 깊은 역사여행을 함께 떠났다.

글. 정혜영 | 사진. 김범기

남다른 교육관으로 아이 자신감 키워내
여름의 뜨거운 햇빛 속에도 화성행궁에는 평온함과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고궁의 정취를 느끼며 교과서로 떠나는 여행길에는 전은희 씨와 4남매 중 막내인 이켄나 모자가 함께 떠났다. 이들에게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다문화가정이라는 점이다. 전은희 씨는 나이지리아 사람인 음보 윌프레드 나위게 씨와 지난 1999년 결혼해 2000년부터 한국에서 4남매를 기르고 있다. 다문화 가정에서 겪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주변과 소통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오늘 여행에 참여한 이유도 피부색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지난 5월에는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이 주최한 좋은 부모상 시상식에서 대상(여성가족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라.”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이켄나의 모습엔 어딘가 모르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을 근본으로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손실됐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역사 공부도 하고 재미도 얻는 ‘스탬프 투어’
이번 여행은 수원화성을 천천히 걸어가며 도장으로 인증받는 ‘스탬프 투어’를 택했다. 화성행궁을 들어서자 오랜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켄나는 “이 나무는 왜 이렇게 갈라져 있냐.”며 궁금해했다. 엄마는 “대단한 생명력과 오랜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나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600년 이상 된 노거수이며 느티나무인데 깨지고 갈라졌지만 여전히 웅장한 모습은 화성행궁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 준다. 오랜 느티나무가 있는 신풍루의 ‘신풍’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는 한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로도 느껴진다. 겉으로 보았을 때 다른 관아 건물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지만 내부로 들어가 보니 그 격식이나 품격이 궁궐의 축소판 같다.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화성행궁’
화성행궁을 둘러보던 이켄나는 “왜 이렇게 똑같은 문이 많은 거예요? 엄마 잃어버리면 못 찾겠다.”며 질문을 쏟아냈다. 수원행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질문들이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이며 행궁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으로 명명한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 건물로 이용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됐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지속했고 2003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을 근본으로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이며
행궁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다.

정조가 오래 머물렀던 ‘봉수당’
신풍루를 거쳐 좌익문과 중앙문을 지나서 중심 전각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도 스탬프를 찍고 봉수당을 둘러봤다. 봉수당 안에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인형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엄마는 봉수당 내부를 보면서 “이켄나도 정조처럼 효심 깊은 아이가 될 수 있을까?”라며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설명했다. 이켄나는 웃음으로 답을 하며 회갑연을 재현한 인형에 집중한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을 올리는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으며,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정조가 행차했을 때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이다.

과거시험과 양로연이 열렸던 ‘낙남헌’
화성행궁에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에 복이 들어오는 다복문과 장복문이 있다.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이켄나와 엄마도 장복문을 지나며 행운을 빌고 낙남헌으로 향했다. 봉수당 우측에 있는 낙남헌은 일제 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으로 유명하다. 정조가 이곳에서 과거시험과 양로연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운한각’
화성행궁을 관람하는 내내 정조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켄나의 궁금증은 운한각에서 풀렸다. 화령전의 운한각 안에는 융복에 전립을 쓴 정조의 초상화가 있다. 사실 화령전에 모신 어진 속 정조의 모습은 본래 모습이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꽃미남의 모습이었다. 암울했던 조선 후기에 한줄기 빛이 됐던 정조가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만든 열정에 모자는잠시 목례를 했다. 화성행궁 역사 탐방을 한 후 정조의 기세를 배우기 위해 국궁 활쏘기 체험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아쉽게도 표가 모두 매진이 되어서 체험을 못해 아쉬웠지만 수원화성의 동문 창룡문을 거닐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효심 가득했던 정조를 만나는 역사여행
수원 ‘화성행궁’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몇 번을 둘러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특히 수원화성의 꽃, 화성행궁은 놓치면 후회할 최고의 명소로 꼽힌다. 조선 후기 국운을 되살리려 했던 정조는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축조를 계기로 나라의 재도약을 꾀했다. 정조의 정신이 곳곳에 스며있는 화성행궁으로 전은희·이켄나 모자가 의미 깊은 역사여행을 함께 떠났다.

글. 정혜영 | 사진. 김범기

남다른 교육관으로 아이 자신감 키워내
여름의 뜨거운 햇빛 속에도 화성행궁에는 평온함과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고궁의 정취를 느끼며 교과서로 떠나는 여행길에는 전은희 씨와 4남매 중 막내인 이켄나 모자가 함께 떠났다. 이들에게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다문화가정이라는 점이다. 전은희 씨는 나이지리아 사람인 음보 윌프레드 나위게 씨와 지난 1999년 결혼해 2000년부터 한국에서 4남매를 기르고 있다. 다문화 가정에서 겪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주변과 소통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오늘 여행에 참여한 이유도 피부색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지난 5월에는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이 주최한 좋은 부모상 시상식에서 대상(여성가족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라.”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이켄나의 모습엔 어딘가 모르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을 근본으로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손실됐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역사 공부도 하고 재미도 얻는 ‘스탬프 투어’
이번 여행은 수원화성을 천천히 걸어가며 도장으로 인증받는 ‘스탬프 투어’를 택했다. 화성행궁을 들어서자 오랜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켄나는 “이 나무는 왜 이렇게 갈라져 있냐.”며 궁금해했다. 엄마는 “대단한 생명력과 오랜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나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600년 이상 된 노거수이며 느티나무인데 깨지고 갈라졌지만 여전히 웅장한 모습은 화성행궁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 준다. 오랜 느티나무가 있는 신풍루의 ‘신풍’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는 한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로도 느껴진다. 겉으로 보았을 때 다른 관아 건물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지만 내부로 들어가 보니 그 격식이나 품격이 궁궐의 축소판 같다.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화성행궁’
화성행궁을 둘러보던 이켄나는 “왜 이렇게 똑같은 문이 많은 거예요? 엄마 잃어버리면 못 찾겠다.”며 질문을 쏟아냈다. 수원행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질문들이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이며 행궁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으로 명명한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 건물로 이용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됐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지속했고 2003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을 근본으로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이며
행궁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다.

정조가 오래 머물렀던 ‘봉수당’
신풍루를 거쳐 좌익문과 중앙문을 지나서 중심 전각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도 스탬프를 찍고 봉수당을 둘러봤다. 봉수당 안에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인형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엄마는 봉수당 내부를 보면서 “이켄나도 정조처럼 효심 깊은 아이가 될 수 있을까?”라며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설명했다. 이켄나는 웃음으로 답을 하며 회갑연을 재현한 인형에 집중한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을 올리는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으며,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정조가 행차했을 때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이다.

과거시험과 양로연이 열렸던 ‘낙남헌’
화성행궁에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에 복이 들어오는 다복문과 장복문이 있다.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이켄나와 엄마도 장복문을 지나며 행운을 빌고 낙남헌으로 향했다. 봉수당 우측에 있는 낙남헌은 일제 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으로 유명하다. 정조가 이곳에서 과거시험과 양로연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운한각’
화성행궁을 관람하는 내내 정조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켄나의 궁금증은 운한각에서 풀렸다. 화령전의 운한각 안에는 융복에 전립을 쓴 정조의 초상화가 있다. 사실 화령전에 모신 어진 속 정조의 모습은 본래 모습이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꽃미남의 모습이었다. 암울했던 조선 후기에 한줄기 빛이 됐던 정조가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만든 열정에 모자는잠시 목례를 했다. 화성행궁 역사 탐방을 한 후 정조의 기세를 배우기 위해 국궁 활쏘기 체험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아쉽게도 표가 모두 매진이 되어서 체험을 못해 아쉬웠지만 수원화성의 동문 창룡문을 거닐며 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