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등굣길
차이가 차별로 이어진
시간을 필름으로 엮다

영화 <학교 가는 길>

‘학교 가는 길’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모습은?
부모가 직접 정문까지 바래다주거나 친구들끼리 담소를 나누며 가벼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런 장면일 테다. 반면, 우리 주위 어떤 친구들은 여기에 한없이 무거운 ‘투쟁’이란 단어와 함께 길고 긴 시간 ‘17년’을 덧붙여야만 했다.

글. 김민겸 칼럼리스트

왕복 3시간의 등하굣길
등교를 서두르는 지현이네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다. 6시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학교 셔틀 버스에 오른 건 아침 7시 3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각. 학교에 도착하니 시침은 9시를 넘겨 가리키고 있다. 그렇게 지현이는 통학을 위해 왕복 3시간이 넘는 시간을 도로 위에서 소비하는 중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집 앞 슈퍼 가는 것처럼 가벼운 등굣길이 왜 지현이에겐 허락되지 않는 걸까? 이건 순전히 지현이의 몸이 불편하다는 데서 비롯한 결과다. 인생이라는 레이스에서 출발도 하기 전에 핸디캡을 받는 장애인. 그들은 여기에 장애물까지 만나면서 결승선에 다다르는 일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2017년 어느 날,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그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가까운 곳에서 학교를 다닐 수만 있기를 바란다며 무릎을 꿇은 어머니들이 담겨 있었다. 서울 강서구 지역 특수학교 신설을 놓고 열린 주민토론회에서 장애학생 학부모들이 인심에 호소하고자 하는 간절함이었다. 필자 역시 이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나라 기초 복지의 열악한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독은 이 사진을 보며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한 뼘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말한다.

되풀이하는 차별의 역사
지현이가 먼 곳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덴 다른 이유가 없다. 집 근처에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학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후로 7년의 시간 동안 공사가 미뤄졌다. 이는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공진초등학교(이하 공진초) 이전부터 지역구 유력 국회의원의 선심성 공약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데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진초가 이전한 이유는 뭘까? 학령 인구의 감소로 지방에 폐교가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와 같은 이유일까? 아니다. 애초에 공진초에 배정받는 거주 지역을 불합리하게 정했기 때문이다. 원래 공진초는 임대 아파트를 포함한 여러 아파트에서 입학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임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란 프레임이 씌워지고 나자 공진초와 가까운 아파트 입주민들은 ‘내 아이를 가난한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 못 보낸다’는 민원을 지속적으로 넣었다. 결국 이를 수용하기로 한 당시 강서교육지원청이 해당 아파트를 ‘공동 통학구역’ 으로 지정하면서 아이들을 길 건너 인근 초등학교로 옮길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 이후 비(非)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빠르게 빠져나갔고, 임대 아파트 아이들이 졸업한 이후엔 입학생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가난에 대한 차별을 겪던 과거에서 장애에 대한 차별을 겪는 현재로 이어지며 공진초 부지는 ‘차별이 대물림되는 땅’이라는 오명을 얻는다. 제3자도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침착한 시선을 유지한다. 섣부른 편 가르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악(惡)으로 묘사하면 어쩌지?’란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강서구 주민들이 특수학교 설립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게 된 구조적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보다 근원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목숨 걸고 지켜준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야 진정한
복지 국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목숨 걸고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사회
2020년 3월, 마침내 ‘서진학교’라는 이름의 특수학교가 설립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과연 이를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공진초 부지에 서진학교가 들어설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는 이은자 씨. 정작 그녀의 딸 지현이는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의 진출을 앞두고 있다. 그 길고 긴 싸움 끝에 특수학교가 세워지는데도 혜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속 장애학생부모회 어머니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가 겪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누구보다도 내일처럼 생각하며 현실과 맞서 싸운다. 이렇듯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는 꽤 묵직하다. <학교 가는 길>이란 제목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다가 나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게되는 이유다.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제대로 된 독립이 어려운 사회 구조. 남과 다르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 다르지 않음에도 왜 그들에게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 사회에 진출해 구성원으로서의 몫을 다 하는 일이 남들보다 길고 멀어야만 하는 걸까. 더 이상 장애학생의 부모가 “목숨 걸고 지켜줄게.”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야 진정한 복지 국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닌 ‘열린 결말’이다. 그리고 웃음 짓는 결말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내 친구의 등굣길
차이가 차별로 이어진
시간을 필름으로 엮다

영화 <학교 가는 길>

‘학교 가는 길’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모습은?
부모가 직접 정문까지 바래다주거나 친구들끼리 담소를 나누며 가벼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런 장면일 테다. 반면, 우리 주위 어떤 친구들은 여기에 한없이 무거운 ‘투쟁’이란 단어와 함께 길고 긴 시간 ‘17년’을 덧붙여야만 했다.

글. 김민겸 칼럼리스트

왕복 3시간의 등하굣길
등교를 서두르는 지현이네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다. 6시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학교 셔틀 버스에 오른 건 아침 7시 3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각. 학교에 도착하니 시침은 9시를 넘겨 가리키고 있다. 그렇게 지현이는 통학을 위해 왕복 3시간이 넘는 시간을 도로 위에서 소비하는 중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집 앞 슈퍼 가는 것처럼 가벼운 등굣길이 왜 지현이에겐 허락되지 않는 걸까? 이건 순전히 지현이의 몸이 불편하다는 데서 비롯한 결과다. 인생이라는 레이스에서 출발도 하기 전에 핸디캡을 받는 장애인. 그들은 여기에 장애물까지 만나면서 결승선에 다다르는 일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2017년 어느 날,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그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가까운 곳에서 학교를 다닐 수만 있기를 바란다며 무릎을 꿇은 어머니들이 담겨 있었다. 서울 강서구 지역 특수학교 신설을 놓고 열린 주민토론회에서 장애학생 학부모들이 인심에 호소하고자 하는 간절함이었다. 필자 역시 이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나라 기초 복지의 열악한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독은 이 사진을 보며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한 뼘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말한다.

되풀이하는 차별의 역사
지현이가 먼 곳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덴 다른 이유가 없다. 집 근처에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학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후로 7년의 시간 동안 공사가 미뤄졌다. 이는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공진초등학교(이하 공진초) 이전부터 지역구 유력 국회의원의 선심성 공약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데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진초가 이전한 이유는 뭘까? 학령 인구의 감소로 지방에 폐교가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와 같은 이유일까? 아니다. 애초에 공진초에 배정받는 거주 지역을 불합리하게 정했기 때문이다. 원래 공진초는 임대 아파트를 포함한 여러 아파트에서 입학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임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란 프레임이 씌워지고 나자 공진초와 가까운 아파트 입주민들은 ‘내 아이를 가난한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 못 보낸다’는 민원을 지속적으로 넣었다. 결국 이를 수용하기로 한 당시 강서교육지원청이 해당 아파트를 ‘공동 통학구역’ 으로 지정하면서 아이들을 길 건너 인근 초등학교로 옮길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 이후 비(非)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빠르게 빠져나갔고, 임대 아파트 아이들이 졸업한 이후엔 입학생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가난에 대한 차별을 겪던 과거에서 장애에 대한 차별을 겪는 현재로 이어지며 공진초 부지는 ‘차별이 대물림되는 땅’이라는 오명을 얻는다. 제3자도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침착한 시선을 유지한다. 섣부른 편 가르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악(惡)으로 묘사하면 어쩌지?’란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강서구 주민들이 특수학교 설립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게 된 구조적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보다 근원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목숨 걸고 지켜준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야 진정한
복지 국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목숨 걸고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사회
2020년 3월, 마침내 ‘서진학교’라는 이름의 특수학교가 설립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과연 이를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공진초 부지에 서진학교가 들어설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는 이은자 씨. 정작 그녀의 딸 지현이는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의 진출을 앞두고 있다. 그 길고 긴 싸움 끝에 특수학교가 세워지는데도 혜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속 장애학생부모회 어머니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가 겪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누구보다도 내일처럼 생각하며 현실과 맞서 싸운다. 이렇듯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는 꽤 묵직하다. <학교 가는 길>이란 제목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다가 나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게되는 이유다.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제대로 된 독립이 어려운 사회 구조. 남과 다르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 다르지 않음에도 왜 그들에게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 사회에 진출해 구성원으로서의 몫을 다 하는 일이 남들보다 길고 멀어야만 하는 걸까. 더 이상 장애학생의 부모가 “목숨 걸고 지켜줄게.”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야 진정한 복지 국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닌 ‘열린 결말’이다. 그리고 웃음 짓는 결말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