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한 토론교육

● 글·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사회갈등과 민주시민교육의 필요

영국의 ‘The Economist’지는 매년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그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는 최고 등급인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국가 그룹에 속한다. 비록 그 그룹에서는 마지막 순위(23위)에 올랐지만, 그리고 재작년 까지만 해도 해당 그룹에 속하지 못하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 그룹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 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년에는 심지어 프랑스보다 순위가 높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제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만 아마 누구도 쉽게 저런 평가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성취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도 우리 민주주의가 완전하다거나 충분하다는 주장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장구를 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민주 주의와 관련해서는 가령 5년 단임의 대통령제나 소선거구제 같은 제도 차원의 한계나 아직도 완강한 지역주의와 강하고 소모적인 정치적 양극화 같은 문화적 차원의 미숙함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질 않는다. 사실 ‘The Economist’지의 민주주의 지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 참여’ 영역과 함께 특히 ‘정치 문화’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매겼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갈등’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한국의 갈등지수는 OECD 30개국 중 3위로 최악 수준이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소모적인 갈등은 그 해결을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고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 특히 극심한 이념 대립의 문제가 심각하다.
이 문제는 한 편으로 민주적 사회통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와 과제를 제시해 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중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은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 갈등, 혐오, 극단적 공격성 같은 문화적 병 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교육적 예방 조치를 마련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로 민주시민교육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극심한 이념 갈등은 그런 예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조차 심각한 사회정치적 갈등의 대상으로 만들곤 한다. 이런 저런 계기교육이나 역사교육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의 극심한 냉전형 이념 대립이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갈등을 낳고, 거꾸로 그러한 갈등이 그런 이념 대립을 증폭시키는 악순환마저 낳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에서 때때로 냉전적인 극한성을 드러내곤 하는 이런 종류의 갈등과 대립을 에둘러 갈 수 있을까?

교육은 갈등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얼핏 지금 우리 사회에서처럼 다양한 차원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한 곳에서 쟁점이 되는 여러 민감한 주제들을 교육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주제들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 민감한 주제들은 자칫 학교에서 갈등을 더 크게 키울 수 있고, 교실을 넘어 학부모들이나 일반 사회에서도 우려를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오히려 비교육적이라고 해야 한다. 이미 학생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교육 현장에서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은 SNS 등의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대부분은 아주 극단적인 견해에 포획되고 특정 대상이나 반대 의견에 대한 혐오가 증폭될 우려가 크다.
민감한 사회적 문제들이라도 교실 안에서 다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은 어떤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형성하면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해야 함을 배울 수 있고, 다른 의견들도 어리석거나 황당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배울 수 있다. 또 그래야 학생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와는 다른 의견을 배척하고 적대시할 게 아니라 그 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따져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야 함을 학습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필요하면 바꿀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교육에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거나 갈등을 회피해야 한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주입식 교화(indoctrination) 교육’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사실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념 갈등은 ‘진보’나 ‘보수’ 같은 특정한 정치적 지향 자체보 다는 정확히 바로 이런 교육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교육관에서 학생들은 그저 교과서와 교사에 의해 일방 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사고와 지식을 주입받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전제된다. 그러다보니 교사들이 혹시 자신 들의 정치적인 지향이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 하지 않을지 하는 걱정이 일고, 따라서 그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아예 사회적 갈등과 관련된 주제들은 교육 현장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관은 무척 낡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교육관은 그 근본에서 배우는 학생들을 저마다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하겠다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성장하는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의 참된 주인이 되고, 그리하여 참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교육의 참된 출발점이자 지향점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에둘러 가야 할 진짜 함정은 단순히 이념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어쩌면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와 같은 낡고 반민주적인 교육관이다.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이견이 분분한 사안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한 가지 시각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결국 피교육자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교육자의 의도대로 조작 가능한 ‘사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다. 어리더라도 우리 학생들의 인간성을 존중하고 그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교육은 역사 문제든 다른 사회 문제든 특정한 관점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 하지 말고 다양한 시각과 논점을 제시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스스로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그 기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낡고 반인권적이며 반민주적인 주입식 교화교육에 대한 신념과 사유 습성을 버릴 때가 되었다. 대 안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인간 개개인이 지닌 자기 삶에 대한 주권성과 그 불가침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것을 그 출발점이자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와 이견 등에 대한 관용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의견과 관점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안 들이라고 무작정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대안은 그것 들을 끌어안아 교육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이 바로 그 대안이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에서 배우기

이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다. 통일 전의 분단국가 독일에서도 교육 문제를 두고 우리와 비슷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 좌우 진영은 서로에 대해 ‘의식화’ 또는 ‘우민화’ 교육을 그만두라며 날선 이념전쟁을 치렀더랬다. 이 와중에 1976년 독일의 한 소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르는 ‘정치교육’ 관련자들이 좌우 진영을 망라하여 함께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그와 같은 원칙을 합의해 내었다.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다.
이 합의에 따르면, 정치교육은 1)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하며(강제 또는 교화의 금지), 2)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논쟁성에 대한 요청), 3)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분석능력 및 학생의 이해관계 중심) 해야 한다. 이 합의는 단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영국에서는 아예 교육법 안에 유사한 원칙들을 담았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합의는 그 핵심에서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에대한 존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지양하고,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쟁을 교실에서 재현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끔 성장시키겠다.’ 는 정신의 표현이다. ‘정치보다 교육적 관점이 우선해야 한다.’ 는 인식의 표현으로, 우리 헌법에 명기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도 (흔히 정치적 사안에 대한 회피의 원칙으로 오해되지만) 바로 이 점을 지시한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 주목하면, 우리는 독일의 보이텔스 바흐 합의가 그저 특별히 독일적인 상황에서 나온 특수한 교육적 원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함축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보편적인 교육적 원칙을 표현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두 번째 원칙, 곧 ‘논쟁성의 원칙’에 주목해야 한다. 합의 조항 자체가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이 원칙은 그 자체로 주입식 교화교육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 이 원칙은 존 스튜어트 밀이 천명했던 ‘토론을 통한 통치(government by discussion)’라는 숙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교육적 차원에서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논쟁성의 원칙에 따른 토론식 교육은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 민주시민교육을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체로 가장 탁월한 민주시민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

토론은 일반적으로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 아주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곤 한다. 그러나 토론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다른 데 있다. 토론은 말하자면 사람들이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문제를 토론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고 우리가 함께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서로 협동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해와 진실한 소통 없이 토론은 불가능하며, 바로 여기에 또한 토론이 지닌 교육적 의미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토론의 과정에서 우리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다. 토론의 참가자들은 서로 평등하다. 누구도 우월한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 토론의 장에서는 나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누구든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누구의 의견이든 논박당할 수 있다. 자유와 상호간에 대한 깊은 존중은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조직폭력배들은 ‘회의’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토론’은 할 수 없다. 토론은 민주적인 조직, 민주적인 인간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토론은 민주적인 공동의 삶의 양식 그 자체다.
토론에서는 누가 우월한 관점을 제시했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다. 토론을 통해 형성된 견해나 입장은 토론의 과정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토론에 참가한 모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견해나 입장은 일종의 협동 또는 공동작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제기된 문제에 비추어 평가되지, 제기한 사람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 모든 사람들이 존중되고 가능한 한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어떤 결론을 채택하고자 하기 때문에 설사 어느 한 사람의 제안이 결론으로 채택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결국 참여자 모두의 제안이자 결론이고 ‘우리’의 제안이자 결론이 된다.
토론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것은 사실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서로가 토론을 한다고 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만을 개진한다거나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지도 않고 서로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화를 우리는 토론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이나 제안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런 대화도 토론은 아니다. 대화를 통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지식 또는 관점 등을 얻게 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대화는 ‘잡담’이나 ‘수다’다. 기껏해야 그냥 ‘대화’다.
토론은 단지 민주주의의 수단이나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시민적 덕성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그러한 덕성은 단지 토론이 일상화되고 공동생활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실질적인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이 왜 그 자체로 가장 탁월한 민주시민교육인지는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 질 것이다. 이런 교육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살펴보자.

•상호존중과 배려: 토론은 토론에 참여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공유된 인식을 나눌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또는 단지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대화에 참여할 때, 그것은 토론이 될 수 없다. 모두에게 다 연관되는 문제를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하려는 것이 토론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이 토론은 성립할 수 없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토론의 출발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 이상의 이해방식과 접근이 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하기도 하다는 것이 토론의 전제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은 용인될 뿐만 아니라 적극 고무되고 장려되어야만 한다.
•타인의 의견 존중: 토론의 합리성은 곧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을 존중하는 데서 성립한다. 참가자들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적 태도를 버릴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의견이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나 증거 등에 의해 반박당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반권위주의 /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 토론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지식과 신념의 권위는 오직 사람들 상호간의 동의와 설득에 의해서만 확보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곧 모든 지식과 신념은 의심될 수 있고 논박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의 의견을 포함하여 모든 의견은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중하고 사려 깊게 검토하고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독일 J. W. Gorthe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2013~2015)을 역임 하였다. 현재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보아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한 토론교육

● 글·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사회갈등과 민주시민교육의 필요

영국의 ‘The Economist’지는 매년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그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는 최고 등급인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국가 그룹에 속한다. 비록 그 그룹에서는 마지막 순위(23위)에 올랐지만, 그리고 재작년 까지만 해도 해당 그룹에 속하지 못하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 그룹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 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년에는 심지어 프랑스보다 순위가 높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제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만 아마 누구도 쉽게 저런 평가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성취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도 우리 민주주의가 완전하다거나 충분하다는 주장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장구를 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민주 주의와 관련해서는 가령 5년 단임의 대통령제나 소선거구제 같은 제도 차원의 한계나 아직도 완강한 지역주의와 강하고 소모적인 정치적 양극화 같은 문화적 차원의 미숙함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질 않는다. 사실 ‘The Economist’지의 민주주의 지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 참여’ 영역과 함께 특히 ‘정치 문화’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매겼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갈등’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한국의 갈등지수는 OECD 30개국 중 3위로 최악 수준이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소모적인 갈등은 그 해결을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고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 특히 극심한 이념 대립의 문제가 심각하다.
이 문제는 한 편으로 민주적 사회통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와 과제를 제시해 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중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은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 갈등, 혐오, 극단적 공격성 같은 문화적 병 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교육적 예방 조치를 마련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로 민주시민교육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극심한 이념 갈등은 그런 예방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조차 심각한 사회정치적 갈등의 대상으로 만들곤 한다. 이런 저런 계기교육이나 역사교육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의 극심한 냉전형 이념 대립이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갈등을 낳고, 거꾸로 그러한 갈등이 그런 이념 대립을 증폭시키는 악순환마저 낳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에서 때때로 냉전적인 극한성을 드러내곤 하는 이런 종류의 갈등과 대립을 에둘러 갈 수 있을까?

교육은 갈등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얼핏 지금 우리 사회에서처럼 다양한 차원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한 곳에서 쟁점이 되는 여러 민감한 주제들을 교육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주제들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 민감한 주제들은 자칫 학교에서 갈등을 더 크게 키울 수 있고, 교실을 넘어 학부모들이나 일반 사회에서도 우려를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오히려 비교육적이라고 해야 한다. 이미 학생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교육 현장에서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은 SNS 등의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대부분은 아주 극단적인 견해에 포획되고 특정 대상이나 반대 의견에 대한 혐오가 증폭될 우려가 크다.
민감한 사회적 문제들이라도 교실 안에서 다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은 어떤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형성하면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해야 함을 배울 수 있고, 다른 의견들도 어리석거나 황당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배울 수 있다. 또 그래야 학생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와는 다른 의견을 배척하고 적대시할 게 아니라 그 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따져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야 함을 학습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필요하면 바꿀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교육에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거나 갈등을 회피해야 한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주입식 교화(indoctrination) 교육’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사실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념 갈등은 ‘진보’나 ‘보수’ 같은 특정한 정치적 지향 자체보 다는 정확히 바로 이런 교육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교육관에서 학생들은 그저 교과서와 교사에 의해 일방 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사고와 지식을 주입받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전제된다. 그러다보니 교사들이 혹시 자신 들의 정치적인 지향이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 하지 않을지 하는 걱정이 일고, 따라서 그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아예 사회적 갈등과 관련된 주제들은 교육 현장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관은 무척 낡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교육관은 그 근본에서 배우는 학생들을 저마다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하겠다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성장하는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의 참된 주인이 되고, 그리하여 참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교육의 참된 출발점이자 지향점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에둘러 가야 할 진짜 함정은 단순히 이념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어쩌면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와 같은 낡고 반민주적인 교육관이다.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이견이 분분한 사안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한 가지 시각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결국 피교육자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교육자의 의도대로 조작 가능한 ‘사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다. 어리더라도 우리 학생들의 인간성을 존중하고 그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교육은 역사 문제든 다른 사회 문제든 특정한 관점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 하지 말고 다양한 시각과 논점을 제시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스스로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그 기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낡고 반인권적이며 반민주적인 주입식 교화교육에 대한 신념과 사유 습성을 버릴 때가 되었다. 대 안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인간 개개인이 지닌 자기 삶에 대한 주권성과 그 불가침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것을 그 출발점이자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와 이견 등에 대한 관용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의견과 관점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안 들이라고 무작정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대안은 그것 들을 끌어안아 교육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이 바로 그 대안이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에서 배우기

이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다. 통일 전의 분단국가 독일에서도 교육 문제를 두고 우리와 비슷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 좌우 진영은 서로에 대해 ‘의식화’ 또는 ‘우민화’ 교육을 그만두라며 날선 이념전쟁을 치렀더랬다. 이 와중에 1976년 독일의 한 소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르는 ‘정치교육’ 관련자들이 좌우 진영을 망라하여 함께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그와 같은 원칙을 합의해 내었다.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다.
이 합의에 따르면, 정치교육은 1)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하며(강제 또는 교화의 금지), 2)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논쟁성에 대한 요청), 3)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분석능력 및 학생의 이해관계 중심) 해야 한다. 이 합의는 단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영국에서는 아예 교육법 안에 유사한 원칙들을 담았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합의는 그 핵심에서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에대한 존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지양하고,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쟁을 교실에서 재현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끔 성장시키겠다.’ 는 정신의 표현이다. ‘정치보다 교육적 관점이 우선해야 한다.’ 는 인식의 표현으로, 우리 헌법에 명기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도 (흔히 정치적 사안에 대한 회피의 원칙으로 오해되지만) 바로 이 점을 지시한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 주목하면, 우리는 독일의 보이텔스 바흐 합의가 그저 특별히 독일적인 상황에서 나온 특수한 교육적 원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교육이 필연적으로 함축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보편적인 교육적 원칙을 표현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두 번째 원칙, 곧 ‘논쟁성의 원칙’에 주목해야 한다. 합의 조항 자체가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이 원칙은 그 자체로 주입식 교화교육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 이 원칙은 존 스튜어트 밀이 천명했던 ‘토론을 통한 통치(government by discussion)’라는 숙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교육적 차원에서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논쟁성의 원칙에 따른 토론식 교육은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 민주시민교육을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체로 가장 탁월한 민주시민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

토론은 일반적으로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 아주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곤 한다. 그러나 토론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다른 데 있다. 토론은 말하자면 사람들이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문제를 토론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고 우리가 함께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서로 협동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해와 진실한 소통 없이 토론은 불가능하며, 바로 여기에 또한 토론이 지닌 교육적 의미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토론의 과정에서 우리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다. 토론의 참가자들은 서로 평등하다. 누구도 우월한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 토론의 장에서는 나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누구든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누구의 의견이든 논박당할 수 있다. 자유와 상호간에 대한 깊은 존중은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조직폭력배들은 ‘회의’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토론’은 할 수 없다. 토론은 민주적인 조직, 민주적인 인간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토론은 민주적인 공동의 삶의 양식 그 자체다.
토론에서는 누가 우월한 관점을 제시했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다. 토론을 통해 형성된 견해나 입장은 토론의 과정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토론에 참가한 모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견해나 입장은 일종의 협동 또는 공동작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제기된 문제에 비추어 평가되지, 제기한 사람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 모든 사람들이 존중되고 가능한 한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어떤 결론을 채택하고자 하기 때문에 설사 어느 한 사람의 제안이 결론으로 채택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결국 참여자 모두의 제안이자 결론이고 ‘우리’의 제안이자 결론이 된다.
토론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것은 사실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서로가 토론을 한다고 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만을 개진한다거나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지도 않고 서로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화를 우리는 토론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이나 제안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런 대화도 토론은 아니다. 대화를 통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지식 또는 관점 등을 얻게 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대화는 ‘잡담’이나 ‘수다’다. 기껏해야 그냥 ‘대화’다.
토론은 단지 민주주의의 수단이나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시민적 덕성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그러한 덕성은 단지 토론이 일상화되고 공동생활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실질적인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이 왜 그 자체로 가장 탁월한 민주시민교육인지는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 질 것이다. 이런 교육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살펴보자.

•상호존중과 배려: 토론은 토론에 참여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공유된 인식을 나눌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또는 단지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대화에 참여할 때, 그것은 토론이 될 수 없다. 모두에게 다 연관되는 문제를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하려는 것이 토론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이 토론은 성립할 수 없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토론의 출발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 이상의 이해방식과 접근이 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하기도 하다는 것이 토론의 전제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은 용인될 뿐만 아니라 적극 고무되고 장려되어야만 한다.
•타인의 의견 존중: 토론의 합리성은 곧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을 존중하는 데서 성립한다. 참가자들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적 태도를 버릴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의견이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나 증거 등에 의해 반박당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반권위주의 /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 토론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지식과 신념의 권위는 오직 사람들 상호간의 동의와 설득에 의해서만 확보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곧 모든 지식과 신념은 의심될 수 있고 논박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의 의견을 포함하여 모든 의견은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중하고 사려 깊게 검토하고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독일 J. W. Gorthe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2013~2015)을 역임 하였다. 현재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보아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