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질문

글·김창원 경인교육대학교 총장

‘수학사의 마지막 거인’으로 불리는 독일 수학자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는 1900년 개최된 제2차 세계수학자대회에서 ‘20세기 수학계가 풀어야 할 문제’ 23개를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유명한 칸토어의 연속체 가설이나 리만 가설, 디오판토스 방정식 등을 포함하는 이 목록 중 일부는 20세기 안에 해결되었고, 일부는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중요한 점은, 문제가 해결되었든 안 되었든, 문제 해결을 위한 수많은 수학자들의 도전 덕분에 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와일즈 경(Andrew John Wiles. 1953~ )이 페르마의 대정리를 최종 증명해 가는 과정이 전형적인 보기이다.
‘수알못’인 필자가 뜬금없이 힐베르트 얘기를 하는 이유는 어떤 전환점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갈 길을 내다보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돌아봄은 그간의 여정을 복기하며 점검하기 위함이고, 내다봄은 그를 바탕으로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 개인에서 집단,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반성적 사고가 있어야 한 치라도 발전을 기할 수 있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2000년대, 사반세기를 지나며 돌아보는 교육

올해는 2024년이다. 논리적으로 21세기의 시작은 2001년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천의 자리가 ‘1’에서 ‘2’로 바뀐 2000년이 말하기가 더 편하다. 낳자마자 ‘한 살’을 부여하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도 그렇고, 노스트라다무스가 2000년 대신 1999년을 인류 종말의 해로 예언한 소이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2000년부터 셀 때 올해는 25년째, 곧 사반세기를 지나가는 해다.
돌아보면 20세기는 교육사적으로 분명한 변혁과 창조의 세기였다. 식민 정책이기는 했지만 소-중-대학교의 학제가 자리잡았고, 선언적이기는 하나 교육에서의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으며, 공식 문서 형태의 교과과정과 교과서가 정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여 교육법이 공포되었고, 전 국민 의무교육 확대와 함께 중학교·고등학교가 평준화되었으며, 산업화·민주화·정보화와 세계화 시대를 거치며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여 국가 발전의 초석을 제공하였다. 20세기 우리 교육은, 세부적인 문제점은 많았어도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사반세기를 지나고 있는 21세기는 아직 20세기와 같은 거대 교육 어젠다를 구성하고 실행하는 데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가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비판은 이미 지난 세기말에 나왔는데, 이를 “19세기의 교육 철학에 따라 20세기의 교육 내용을 21세기의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로 바꾸면 오늘날에도 적확하게 들어맞는 말이 된다. 21세기에 태어난 교사가 교단에 서기 시작했는데도 그렇다.

불편한 질문: 그래도 한 번쯤 물어야 할 논제들

대한민국 교육이 20세기의 성공에 취해 21세기의 어젠다를 구성하지 못했다면, 이제쯤에는 조금 낮은 수준의 의제들이라도 끄집어내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인구 변화, 디지털을 중심으로 한 기술 혁명, ‘중진국의 함정’을 떠올리게 하는 성장 정체기에 교육의 대전환 없이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질문을 할 뿐이다. 다만, ‘인간의 본질’, ‘교육의 목적’처럼 철학적이고 원론적인 의제는 접어 두었다. 이들은 매우 중요하고 늘 천착해야 할 의제이지만 어떤 정책적 판단으로 이어지기에는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격차 해소’, ‘대학 입시의 공정성 확보’처럼 문제의식은 공유하지만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는 문제들도 다루지 않았다. 이들은 점검을 계속하면서 최선은 못 돼도 차선이라도 찾아 정책을 펼 일이다.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다룰 논제는 원론적 의제와 기술적 문제의 사이 – 곧 공론화 절차와 정무적 판단으로 방향을 정할 수 있으면서도 그동안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루기를 꺼려 왔던 논제들이다. 일종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까.

학제·학년·학기에 관한 질문

첫째, 70년 넘은 6-3-3-4 학제가 지금도 최선인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기, 정부 수립을 거치며 조금씩 보완되던 기간 학제가 6-3-3-4로 정착된 것은 1951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초등교육 기간이 4년인 적도,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가 4년인 적도 있었다. 오늘날 초등교육은 대부분의 국가가 6년제를 취하지만, 미국은 주마다 다르고, 북한은 4년제 인민학교에서 5년제 소학교로 바꿔 시행하고 있다. 중등교육 역시 6년이 대세이지만 5~8년인 나라도 많아서 초등보다 변폭이 크다. 질문해 보자 – 학생들의 인지·신체 발달이 빨라진 상황에서 유치원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넣어야 하지 않을까? 초등 1학년과 6학년을 같은 학교급으로 두는 방침이 타당한가? 고등학교를 공통(1학년)-선택(2~3학년) 과정으로 나누는 것이 중학교 3년-고등학교 3년의 학제와 부합하는가? 등등의 질문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학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때가 되었다.
둘째, 6세(5세) 입학은 손대면 안 되는 폭탄인가?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난항 끝에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임명한 것이 7월이었다. 그리고 8월에 당사자가 사퇴했다. 그 진앙에 입학 연령 하향이 있다. 세는 나이/연 나이/만 나이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요점은 ‘한 해 당기자’였고, 이에 대해 교육학계·교원 단체·학부모 단체가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연히 여론을 의식한 정치권도 반대했고, 결과가 ‘최단명 사회부총리’였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취지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절차 미비에 대한 반발, 각자의 입장에 따른 확증되지 않은 우려 등이 불합리하게 사태를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임명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있던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평소의 소신을 공론화 없이 발표해 버린 탓도 컸다. 하지만 학제 조정 필요성과 비슷한 이유로, 유치원 교육과정이 정련되고 유-초 연계 경험이 축적되면 다시 한번 의제로 올릴 필요가 있다.
셋째, 그때 9월 입학제를 도입했어야 했나?
북반구의 OECD 국가들은 대부분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 3월에 시작하는 우리나라와 4월에 시작하는 일본이 예외적이다. 그에 비해 호주 등의 남반구는 대체로 3월인데, 북반구든 남반구든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는 점은 같다. 입학 시기를 9월로 옮기자는(= 6개월 당기자는) 주장은 산발적으로 있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학교가 전면적으로 문을 닫으면서 이참에 실행해 보자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론화 과정 없이 즉흥적으로 제기된 아이디어는 즉시 퇴출되었다. 하지만 9월 입학제의 장단점과 그에 대한 거부감은 이제 충분히 드러났으니, 원점에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1년에 한 달씩 학년도를 줄여 가면 6년이면 완결될 과제다.

학생·학습에 관한 질문

넷째, 공정성과 수월성: 개인차는 보편 교육의 이념과 병립할 수없나?
근대교육에서 교육의 공정성과 수월성만큼 오래되고 치열한 논쟁도 드물다. 하지만 공정성이 ‘차별 금지와 추첨’이라는 논리적·기술적 해법을 발견한 데 비해 수월성은 ‘과당과 특혜’ 담론에 빠져 자기 증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평준화다. 특목고·자사고 등 수월성을 지향하는 정책들이 일부 시도되지만 공정성을 내세운 평등주의는 불가침의 조건으로 건재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듯이, 사람마다 학습 특성이 다르고 발달 속도도 다르다. 개성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을 똑같은 목표, 똑같은 수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타당한지 질문할 수 있다. 학습 속도에 따라 속성 과정(또는 월반)이나 지연 과정(‘유급’이라는 용어는 바꿔야겠다.)을 허용하는 것은 평등권 위반인가?(지금도 조기진급·조기졸업이 가능하기는 하다.)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과정을 다르게 짜는 일은 교육적 차별인가? ‘고4’라 하여 필수가 돼 버린 재수는 어찌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관해 ‘최대한의 공정성과 최대한의 수월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교과중심주의: 성장과 연계하는 교과 유연화는 불가능한가?
현재 초·중등학교의 기본 교과는 국어·사회·도덕·수학·과학·실과 (기술·가정)·체육·음악·미술·영어 10개이고, 초등 저학년의 통합 교과나 중학교 이후의 정보·한문 교과 등이 이에 부가되어 있다. 그리고 초·중학교 전체와 고등학교 1학년을 공통 과정(또는 공통 과목)으로 편성하여, 사실상 1~10학년이 단일 과목군으로 배우는 체제다. 10년 동안 모든 학생이 같은 교과를 매년 빠뜨리지 않고 배우는 것이다. 이 체제로는 교과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교육을 위해 교과가 필요하지 교과를 위해 교육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생의 성장과 적성에 맞춰 교과 편제를 유연화하는 문제를 질문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학년에서는 교과 10개를 다 다루지 않아도 되거나, 학습 수요에 따라 교과 간 시수 비율을 조정하는 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복수 자격이나 광역 자격 등으로 교사에게서 교과의 외피를 벗겨내는 일도 필요하다.

교사에 관한 질문

여섯째, 교원 양성, 목적형인가 개방형인가?
우리나라의 교원 양성 체제는 이른바 ‘목적형’에 속한다. 교사가 되려면, 표시 자격에 따라 일부 예외도 있지만, 거의 반드시 교육대학 또는 사범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학위나 경력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더라도 교사가 되려면 다시 처음부터 교·사대를 다녀야 한다. 이 때문에 교육전문대학원 체제를 검토한 적도 있지만 관련 집단의 반대와 절차적 문제 등으로 무산되었다. 비슷한 사례인 의사와 변호사 양성 제도를 살펴보면,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전문가 양성’을 위한 의학전문대학원이 실패한 데 비해 법학전문대 학원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문의 특성과 현장에서의 직업적 특성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원 양성 과정은 의사와 변호사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과 경험을 가지고 교직으로 전환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또는, 유-초등, 초-중등, 일반-특수 사이의 자격 장벽을 낮추는 일은 어떤가? 교·사대에 편입을 허하면 안 되나?
일곱째, 교사의 신분 보장과 질 관리의 갈등
2023년의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에 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교권 4법’이 개정되었고,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따른 교원의 지위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그 과정에서 공식 교원 단체와 비공식적인 교사 모임의 발언 빈도와 내용 수준도 높아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거론을 꺼리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자질이 부족한 교원 문제다. 공교육 12년을 받는 동안, 혹은 자녀를 기르는 동안, 또는 교사로서 근무하는 동안 자질 미달의 교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문제를 일으키는 교사를 교장들이 폭탄 돌리듯 다른 학교로 넘겨 버리는 사례는 얼마나 될까? 교육기본법·교육공무원법 등에 규정한 교원의 신분 보장제가 자질 미달 교원을 위한 방패는 아닐 것이다. 최초 자격을 부여하는 단계부터 임용 단계, 현직 교원 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원의 질 관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대학 졸업 후 40년에 이르는 재직 기간 중 재교육을 의무화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교단에서 배제하는 제도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에 걸맞은 제도와 처우 개선은 당연한 전제다.

교육 기관에 관한 질문

여덟째, 공교육과 사교육, 불가근불가원?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종사자만큼 이율배반적인 대접을 받는 직군도 드문 듯하다. 어느 때는 만악의 근원처럼 매도되다가 또 어느 때는(특히 입시철) 모든 국민이 그 데이터와 노하우를 신줏단지마냥 쳐다본다. 교·사대를 나온 뒤 ‘임용이 안 돼서’ 사교육 강사가 됐다고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능력과 경력을 인정받은 교사들이 사교육 시장으로 옮기는 것을 선망하기도 한다. 과연 사교육은 선행학습과 주입식 교육을 무기로 학부모의 공포심을 자극하며 교육비 부담을 늘리는 주범인가, 아니면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면서 학교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는 교육의 주요 주체인가? 사교육을 의식적으로 모른 체하기보다, 그것이 ‘실재하는 교육 현상’임을 받아들이고 부작용 없이 전향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지 않을까? 공교육 교사와 사교육 교사가 협업하는 모습은 영원히 보기 어려운가?
아홉째, 이 정도 규모의 국가에 고등교육기관은 몇 개가 적절할까?
현재 대교협 회원교는 197개, 전문대교협 회원교는 133개로, 합치면 330개가 된다. 여기에 과학기술원들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산업대학·기술대학 같은 기관들을 합치면 대한민국의 고등교육기관은 얼추 400개 내외가 된다. 인구 5천만 명, 면적 10만㎢라 할 때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는 따져 봐야 하겠지만, 20만 명대로 떨어진 출생아 수를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고등교육기관 수는 분명 과도하다. 물론 대학마다 역사적 레거시가 있고 각 지역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있다. 그렇더라도, 공급 과잉인 대학들에게 생존을 위해 각자 도생하라고 방임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이 클뿐더러 국가의 책임 방기라고 말할 수 있다. 국공립-사립, 대형-중소형, 일반대학-목적대학, 지역 안배 등의 균형점을 찾아 적절한 범위로 고등교육기관 수를 조정해야 한다. 참으로 고통이 많을 이런 일이야말로 국회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할 일이 아닐까.

물론, 더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힐베르트의 23문제와 비교하면 수도 적고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다소 불편하더라도 한번 논의해 보자.’는 취지는 밀릴 일이 없다. 교육은 국가의 의무이자 부모의 의무다. 또한 학생에게는 권리가 된다. 학교와 교사는 자주 상충하는 이들 각각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와 보완을 계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경쟁력’이라든지 ‘진로’라든지 하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현혹되어 더 큰 가치를 놓친 것은 아닌지, 기존 패러다임과 관습의 틀에 갇혀 20세기의 성과를 재생산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하고 또 질문할 때다.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절대적으로 석화되기 때문이다.

김창원
경인교육대학교 총장

서울북공고·용산고 교사와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경인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사는 국어과 교육과정·교과서·평가로서, 2009·2015 교육과정 개발을 책임졌고 6차~2015 교육과정기 초·중·고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대학 수학능력시험 검토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경인교대 총장 겸 전국교원양성대학교 총장협의회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