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실학의 거대 봉우리
다산 정약용 선생을 느끼다
우리나라의 실학은 누가 꽃피웠을까. 실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이고 과학이다.
실학자이자 과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 백성을 위해 다양한 개혁을 건의하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우리나라 실학의 꽃을 피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로 떠나보자.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 주고 실생활을 유익 하게 만들어 준 학문 실학. 실학의 거대 봉우리 정약용 선생의 삶을 느끼고자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를 찾았다. 코로나19 이후 아빠(정동호), 엄마(전혜영),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정윤하)과 6세가 되는 아들(정택준) 가족 모두가 떠나는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역사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이라서 그런지 차가 막히지 않고 목적지에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 남한강이 흐르는 탁 트인 주변 경관은 코로나19를 잊게 할 만큼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마스크 사이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은 봄의 시작을 알려주었고, 다소 생소한 역사관광지 여행은 가족 모두를 더욱 설레게 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떠나는 가족여행인 데다 정약용 선생과 같은 성씨를 가졌다는 친근감 때문인지 더욱 들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정윤하 양은 아직 역사공부를 시작하지 않아서 유적지 여행에 생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정약용이라는 위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도 “아이가 어려서 유직지 여행은 처음”이라며 “앞으로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 많이 다녀야 겠다.”라고 말했다.
과학기술의 전문가이자 실학의 아버지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유명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1762년 남양주 조안면 능대리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약용 유적지는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오랜 유배생활 끝에 생을 마친 곳으로서 안분지족의 삶을 영위하면서 목민심서 등 많은 저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배다리 설계, 수원성 거중기 제작, 고마고 개혁, 가좌부제도 개선, 마과회통 등을 저술했다.
정약용 선생은 20세 전후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학문을 수양하고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재능을 시기 질투했던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천리 머나먼 곳으로 귀향길을 떠나게 된다. 오랜 유배생활 동안 백성들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경험에 실학사상을 더해 실사구시의 학문을 집대성했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에는 문화관, 기념관, 문도사,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묘, 다산문화관, 서화관, 천일각, 기념탑,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실학박물관도 유적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실학의 기본 소양을 키우는 ‘실학박물관’
우리는 실학의 기본 소양을 키우기 위해 정약용 유적지 근처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실학박물관 입구에는 홍이포가 전시돼 있었고, 윤하 양과 택준 군은 신기한 듯 관찰했다.
한글을 잘 모르는 택준 군을 위해 엄마와 아빠는 “홍이는붉은 오랑캐라는 의미로 네덜란드인을 지칭했던 말”이고, 옛 이름으로는 “홀랜드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설명해줬다. 홍이포는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명나라로 전해진 서양 대포로 17세기 초 정두환이 선교사에게 받아 조선에 전시했다.
2층 규모로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전시실에는 실학의 형성, 실학의 전개, 실학과 과학 3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2층 입구에는 실학 영상관이 설치돼 있었고, 마치 작은 영화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족이 나란히 앉아 한참동안 실학에 대한 영화를 감상했다. 이후 실학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했는지, 아이들은 놀이를 하듯 헤드폰을 착용하고 영상을 시청하며 설명을 듣기도 했다. 특히 별자리 영상이 떠다니는 체험존은 어른과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별자리에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대면 관련된 별자리 이름으로 바뀌어 놀이처럼 별자리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학박물관을 나가려고 했으나 거중기, 혼천의, 수례 색칠체험과 퍼즐놀이, 탁본 체험에 윤하 양과 택준 군은 한참동안 흠뻑 빠져 있었다.
정약용 선생의 생애를 담은 미술품 전시
정약용 선생의 생가로 향했다. 입구에 위치한 문화원에는 정약용 선생의 생애를 담은 미술품이 전시돼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샹들리에 작품인 ‘하피첩으로 전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정약용이 두 아들에 당부의 글을 담은 서첩으로 아버지의 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포토존으로 마련된 정약용 선생의 동상에서 옆자리를 차지하고자 쟁탈전이 있었다. 약간의 신경전 끝에 누나인 윤하 양이 정약용 선생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윤하 양과택준 군은 실학박물관에서 알게 된 정약용 선생에 대해 친근감과 궁금증을 보이는 것 같았다. 수원 화성을 거중기를 이용해 짓는 모습을 작게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고 QR코드로 영상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이해를 도왔다.
어린시절과 말년을 보낸 생가 여유당
문화관을 지나 유적지의 가장 중심에는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있다. 여유당은 가운데 마당이 있고 양쪽으로 방의 형태로 구성돼 있다. 정약용 생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 된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여유당에 담긴 뜻은 ‘겨울에는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여유당, 아담한 한옥의 대청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북한강의 장중한 물줄기가 흘러내려 가는 것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집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방 내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적지는 쇠말산이라고 불리던 철마산 산등마루에서 작은 철마가 출토되어 마현이나 마재마을로 불리던 곳이다. 한옥 뒤로는 남양주의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예빈산, 적갑산, 운길산이 새의 보금자리처럼 아득하게 둘러쌓고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명당 묘소
여유당을 둘러보고 누군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윤하 양과 택준 군은 여유당 옆에 위치한 산으로 올라가는 층계로 쏜살 같이 달려갔다. 여유당 뒤편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소다. 곡장으로 둘러싸인 정약용 선생과 부인 풍산홍씨의 합장묘이다. 묘지 양옆으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팔당호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흐르고 있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윤하 양과 택준 군, 엄마, 아빠는 묘소 앞에서 잠시나마 정약용 선생의 삶을 생각하며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묘소를 내려와서 정약용 선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마치 사당처럼 되어 있는 문도사를 찾았다. 생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내부는 정약용 선생의 그림과 제를 올릴 수 있는 가구만이 단출하게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을 모신 사당으로 그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는 공간이었다.
이번 여행에 대해 엄마와 아빠는 “짧지만 알찬 역사여행”이라며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는 윤하에게는 정약용 선생 뿐 아니라 실학에 대한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이 됐고, 미래 과학자가 꿈인 택준에게는 실학,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고, 새로운 재미도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됐다.”고 말했다. 가족 모두에게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역사 유적지가 재미없고 어려운 공간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