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돌봄과
지역사회 돌봄의
거버넌스를 제안한다

글·성태숙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학교 돌봄과 지역사회 돌봄

윤석열 대통령은 초등학교 돌봄교실을 20시까지 연장 운영하겠다며 초등 돌봄 서비스의 확대를 공약하였다. 이는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사회적 돌봄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로 이를 위해 이번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공약은 학교의 초등돌봄교실 운영을 중심으로 일부 보완이 필요한 정책들을 덧붙이는 방향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그 보완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나 다함께돌봄센터와 같은 지역사회 돌봄은 향후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지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역대의 정부들은 한결같이 학교 돌봄교실을 중심으로 초등 돌봄 서비스를 발전시켜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 돌봄은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저 구색 맞추기처럼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실 지역아동센터는 그 연원으로 보자면 1998년 소위 IMF 사태 이후 지역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던 민간의 활동이 제도화된 것이므로 초등 돌봄교실과 더불어 소위 방과후 돌봄을 제도화한 두 바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4,000여 개소 이상 운영되는 지역아동센터의 절반 이상이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시설인 까닭에 제도화의 틈바구니에서는 적절한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정부는 민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취약계층 아동들을 우선 돌보도록 강제하면서 2000년대 들어 돌봄 요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맞벌이 가정의 돌봄 수요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우리 학교의 가장 어려운 아이들, 가장 힘든 친구들이 다니는 지역아동센터는 맞벌이 가정의 돌봄 시설 목록에 아예 오르지도 못했고, 이런 까닭으로 수요가 몰린 초등 돌봄교실은 추첨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지난 문재인정부는 이러한 정책적 수요를 감당할 수 있도록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틈새 돌봄을 담당할 수 있도록 다함께돌봄센터를 지방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지고 설치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다. 지역아동센터에서는 현재 취약계층의 아동들을 민간에서 돌보고, 맞벌이 등 일반 가정의 아동들은 다함께돌봄센터 등 정부가 지원하는 시설에서 돌보게 되는 현재와 같은 대립 구도는 특히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동들에게 심각한 낙인감 등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지만 이는 지역아동센터의 입소 기준을 조금 더 완화하는 방향에서 일단락 되고 말았다.
초등 돌봄교실은 지역사회 돌봄에 대비해 시설 인프라와 학습이나 활동 관련한 기반 마련이 잘 구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우위를 갖는다. 이는 마치 절대적 신화처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런 신화에 금이 간 최초의 사건이 바로 이번 코로나 사태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거대 구조물들이 힘을 잃게 되자 마치 게릴라들이 출몰하듯 작은 지역사회 돌봄들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학교가 문을 닫아건 순간에도 지역사회 돌봄 기관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학교의 온라인 학습을 지원하며 도시락과 방역용품들을 나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는 지역사회 돌봄 기관만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학교 돌봄은 이전과는 훨씬 다른 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 토요일 돌봄까지 시행하는 지역사회 돌봄 기관들이 있다 보니 조금은 지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코로나가 슬금슬금 물러설 기미가 보이고 드디어 학교가 문을 열었다. 아이들과 손잡고 학교 구경을 하러 가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제 더 이상 아침 온라인 수업부터 저녁 급식까지 하루 온종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출 판이다.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돌봄 제도의 발전

현재의 초등 돌봄교실은 2004년 시범사업을 실시하면서 시작되었고, 지역사회 돌봄 서비스의 일종인 지역아동센터 역시 같은 해 아동복지법의 개정으로 민간의 자율 활동에서 하나의 제도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두 제도는 모두 돌봄을 공통적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그 섬세한 결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두 제도를 굳이 구분해보자면 초등 돌봄교실은 보육서비스를 초등 시기까지 연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서비스를 학령기 아동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확대한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제도가 상당히 유사해 보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호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초등 돌봄교실과 복지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아동센터가 교육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를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지권의 실현은 보호권의 실현을 필요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의 실현은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 초등 돌봄교실이나 지역아동센터 모두 개인이나 가정에 의한 돌봄이 아닌 사회가 보장하고 책임지는 사회적 돌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요구는 결국 제도적으로는 사회서비스 발달로 귀결되지만, 그러한 서비스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제공되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제도적 발전에는 제도를 이끄는 주요한 원칙이나 철학들이 함께 제시되어야 하는데 돌봄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입장이나 철학적 관점들이 모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 제도 안에서 ‘이용자 중심의 돌봄’이나 ‘양질의 돌봄 제공’ 등과 같은 원칙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내야 할 원칙들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일견 자명한 의견처럼 보여 더 이상의 반론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한 가지 우려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래 돌봄이란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사이의 상호성이 중요한 제도이므로 이런 원칙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돌봄을 받는 사람이나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가 우리 사회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그 양자가 고르게 사회적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권리도 균형점 위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상호성은 배움이나 돌봄이 그 본질적 의의를 획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회서비스 정책에서 이용자와 공급자라는 소비자주의적 관점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상호성이 흔히 훼손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을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자로만 여기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 역시 잠재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아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성숙하지 못한 돌봄관이 존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방과후 돌봄 역시 분명한 ‘사회적 돌봄’의 일종이지만 아직 중요한 사항들이 다수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며 돌봄 이용자와 제공자는 흔히 이해관계가 상충된 존재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돌봄 정책 중 돌봄 정보를 취합하고 그 선택을 돕기 위한 플랫폼을 구상하고, 돌봄 비용을 사회적으로 산출하고 비용 충당을 위한 방안을 사회적으로 고민하는 등 사회화를 위한 방안들이 많이 고민되고 있지만 그래도 늘 중요한 무언가가 고민의 대상에서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빠져 보이는 것을 혹시 ‘선택’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현대 사회에서 선택은 마치 세상을 움직이는 중추처럼, 때로는 지혜의 요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는 ‘선택할 수 있는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니, 그렇게 만든 지금의 세상은 모두 선택한 사람들이 책임질 일에 다름 아니다. 문제가 있어도 잘못 선택한 사람의 탓이고, 선택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돌봄에서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용자 중심의 돌봄체계를 마련하자는 말도 결국은 이용자가 원하는 돌봄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되며, 양질의 돌봄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공급자들을 적절히 경쟁시키는 속에서 이용자들의 선택을 보장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돌봄의 원칙에서 ‘선택’은 이처럼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런 ‘선택’을 대신할 만한 다른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돌봄 제도 속에서도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정말 그런 ‘선택’을 보장받고 있는지 여부만 잘 살펴보면 그만일 것일까?

돌봄의 새로운 원칙이 되어야 할 거버넌스

그렇게 선택된 돌봄은 비교 대상에 대해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봄은 그 특성상 투입한 시간이나 비용, 행정기록 등과 같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서비스 질에 대한 절대적 측정이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봄 이용자 학대와 같은 전형적인 사건은 포착될 수 있지만, 그 외 미묘한 사항들은 제대로 인식되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 제공자가 바람직한 태도와 가치관을 갖고 돌봄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 이용자들로 하여금 ‘선택’을 통해 알아서 좋은 돌봄을 찾아가도록 하고 있는 지금의 방식은 돌봄 종사자들이 이러한 소명 의식을 갖도록 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운 좋게 한 번에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요행수를 바라는 일이 될 뿐이며 삶의 주요한 환경인 제도에 대해서도 아무런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라면 ‘선택’은 이용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돌봄 제공자 역시 가차 없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돌봄 이용자와 제공자 사이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구성해보고는 적극적 상상을 하며 ‘돌봄 거버넌스(Care Governance) 즉, ‘돌봄 협치’를 꿈꾸기 시작한다.
오늘날 돌봄 기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정의 모습을 일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아이들을 알아서 자기가 돌봐야 하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국 하소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지역에는 어떤 돌봄이 얼마나 필요한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이를 신경 쓰고 있는 사람도 없다. 그저 돌봄이 필요한 가정의 아우성이 잠시 피어올랐다 돌봄을 찾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용자들은 내 욕구만 해결하면 그만이고, 현재의 제공자들은 내가 돌볼 아이들만 모집하면 끝인 근시안적인 태도들만 무성해질 뿐이다. 미래를 위해 자원을 남겨놓는 법도 없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 기관을 위한 시선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절대 강자는 아이들이 몰리는 학교일 수 있다. 학교 돌봄의 너른 잎에 가리운 지역사회 지역아동센터나 다함께돌봄센터와 같은 돌봄기관들은 목마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어려워지면 돌봄 생태계는 학교를 중심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동들을 위해서나 학교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함께 만드는 돌봄

따라서 돌봄 협치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 지역의 돌봄을 우리 지역 스스로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제도적 주체성을 지역에 부여해주는 정부 정책의 적극성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지방정부나 지자체 혹은 교육청이나 교육지원청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돌봄 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가정이 해야 할 바를 규정하고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이를 살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아동과 청소년 당사자를 중심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역의 돌봄 제도를 논의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 그 안에서 돌봄 제도의 다양한 측면들을 실제로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말이 상당히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최소한 현재 돌봄을 하고 있는 기관들을 지금과 같이 개개 시설로 알아서 돌봄을 제공하도록 놔둘 것이 아니라, 동 단위 등의 작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돌봄 공동체로 묶어 내고 이들에게 집합적 공공성을 부여하는 일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돌봄 공동체는 지금의 대부분의 협의회가 하고 있는 것처럼 돌봄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런 자유 의지의 결합은 지역에서 요구하는 돌봄과 관련한 정책적 요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현하는데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적으로 결합한 돌봄 공동체에는 향후 지역의 돌봄 수요를 함께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현재의 돌봄 공급과 수요를 견주어 앞으로 어떤 돌봄 기관을 정책적으로 더 요구할 것인지 혹은 공동체 내에서 이러한 돌봄 욕구를 서비스 조정을 통하여 해소할 것인지 여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정책 결정과 관련한 권한을 일정하게 부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속에는 반드시 돌봄 이용자 당사자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돌봄 이용자를 정책의 수혜 대상자일 뿐만 아니라 돌봄 정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특히 돌봄 제도에서 소외되어 있는 돌봄 당사자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돌봄 공동체에서 학교 돌봄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학교가 먼저 나서서 우리 동네의 돌봄을 함께 만들어가는 길 그것이 새로운 돌봄 협치가 바라는 이상향의 정점일 터이니 말이다.

성태숙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센터장

구로파랑새나눔터공부방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시설장으로 현재 까지 근무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변방의 아이들(민들레출판사) 을 집필하였다.

학교 돌봄과
지역사회 돌봄의
거버넌스를 제안한다

글·성태숙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학교 돌봄과 지역사회 돌봄

윤석열 대통령은 초등학교 돌봄교실을 20시까지 연장 운영하겠다며 초등 돌봄 서비스의 확대를 공약하였다. 이는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사회적 돌봄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로 이를 위해 이번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공약은 학교의 초등돌봄교실 운영을 중심으로 일부 보완이 필요한 정책들을 덧붙이는 방향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그 보완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나 다함께돌봄센터와 같은 지역사회 돌봄은 향후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지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역대의 정부들은 한결같이 학교 돌봄교실을 중심으로 초등 돌봄 서비스를 발전시켜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 돌봄은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저 구색 맞추기처럼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실 지역아동센터는 그 연원으로 보자면 1998년 소위 IMF 사태 이후 지역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던 민간의 활동이 제도화된 것이므로 초등 돌봄교실과 더불어 소위 방과후 돌봄을 제도화한 두 바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4,000여 개소 이상 운영되는 지역아동센터의 절반 이상이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시설인 까닭에 제도화의 틈바구니에서는 적절한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정부는 민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취약계층 아동들을 우선 돌보도록 강제하면서 2000년대 들어 돌봄 요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맞벌이 가정의 돌봄 수요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우리 학교의 가장 어려운 아이들, 가장 힘든 친구들이 다니는 지역아동센터는 맞벌이 가정의 돌봄 시설 목록에 아예 오르지도 못했고, 이런 까닭으로 수요가 몰린 초등 돌봄교실은 추첨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지난 문재인정부는 이러한 정책적 수요를 감당할 수 있도록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틈새 돌봄을 담당할 수 있도록 다함께돌봄센터를 지방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지고 설치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다. 지역아동센터에서는 현재 취약계층의 아동들을 민간에서 돌보고, 맞벌이 등 일반 가정의 아동들은 다함께돌봄센터 등 정부가 지원하는 시설에서 돌보게 되는 현재와 같은 대립 구도는 특히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동들에게 심각한 낙인감 등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지만 이는 지역아동센터의 입소 기준을 조금 더 완화하는 방향에서 일단락 되고 말았다.
초등 돌봄교실은 지역사회 돌봄에 대비해 시설 인프라와 학습이나 활동 관련한 기반 마련이 잘 구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우위를 갖는다. 이는 마치 절대적 신화처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런 신화에 금이 간 최초의 사건이 바로 이번 코로나 사태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거대 구조물들이 힘을 잃게 되자 마치 게릴라들이 출몰하듯 작은 지역사회 돌봄들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학교가 문을 닫아건 순간에도 지역사회 돌봄 기관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학교의 온라인 학습을 지원하며 도시락과 방역용품들을 나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는 지역사회 돌봄 기관만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학교 돌봄은 이전과는 훨씬 다른 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 토요일 돌봄까지 시행하는 지역사회 돌봄 기관들이 있다 보니 조금은 지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코로나가 슬금슬금 물러설 기미가 보이고 드디어 학교가 문을 열었다. 아이들과 손잡고 학교 구경을 하러 가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제 더 이상 아침 온라인 수업부터 저녁 급식까지 하루 온종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출 판이다.

학령기 아동들을 위한 돌봄 제도의 발전

현재의 초등 돌봄교실은 2004년 시범사업을 실시하면서 시작되었고, 지역사회 돌봄 서비스의 일종인 지역아동센터 역시 같은 해 아동복지법의 개정으로 민간의 자율 활동에서 하나의 제도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두 제도는 모두 돌봄을 공통적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그 섬세한 결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두 제도를 굳이 구분해보자면 초등 돌봄교실은 보육서비스를 초등 시기까지 연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서비스를 학령기 아동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확대한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제도가 상당히 유사해 보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호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초등 돌봄교실과 복지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아동센터가 교육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를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지권의 실현은 보호권의 실현을 필요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의 실현은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 초등 돌봄교실이나 지역아동센터 모두 개인이나 가정에 의한 돌봄이 아닌 사회가 보장하고 책임지는 사회적 돌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요구는 결국 제도적으로는 사회서비스 발달로 귀결되지만, 그러한 서비스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제공되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제도적 발전에는 제도를 이끄는 주요한 원칙이나 철학들이 함께 제시되어야 하는데 돌봄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입장이나 철학적 관점들이 모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 제도 안에서 ‘이용자 중심의 돌봄’이나 ‘양질의 돌봄 제공’ 등과 같은 원칙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내야 할 원칙들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일견 자명한 의견처럼 보여 더 이상의 반론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한 가지 우려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래 돌봄이란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사이의 상호성이 중요한 제도이므로 이런 원칙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돌봄을 받는 사람이나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가 우리 사회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그 양자가 고르게 사회적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권리도 균형점 위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상호성은 배움이나 돌봄이 그 본질적 의의를 획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회서비스 정책에서 이용자와 공급자라는 소비자주의적 관점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상호성이 흔히 훼손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을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자로만 여기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 역시 잠재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아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성숙하지 못한 돌봄관이 존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방과후 돌봄 역시 분명한 ‘사회적 돌봄’의 일종이지만 아직 중요한 사항들이 다수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며 돌봄 이용자와 제공자는 흔히 이해관계가 상충된 존재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돌봄 정책 중 돌봄 정보를 취합하고 그 선택을 돕기 위한 플랫폼을 구상하고, 돌봄 비용을 사회적으로 산출하고 비용 충당을 위한 방안을 사회적으로 고민하는 등 사회화를 위한 방안들이 많이 고민되고 있지만 그래도 늘 중요한 무언가가 고민의 대상에서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빠져 보이는 것을 혹시 ‘선택’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현대 사회에서 선택은 마치 세상을 움직이는 중추처럼, 때로는 지혜의 요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는 ‘선택할 수 있는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니, 그렇게 만든 지금의 세상은 모두 선택한 사람들이 책임질 일에 다름 아니다. 문제가 있어도 잘못 선택한 사람의 탓이고, 선택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돌봄에서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용자 중심의 돌봄체계를 마련하자는 말도 결국은 이용자가 원하는 돌봄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되며, 양질의 돌봄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공급자들을 적절히 경쟁시키는 속에서 이용자들의 선택을 보장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돌봄의 원칙에서 ‘선택’은 이처럼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런 ‘선택’을 대신할 만한 다른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돌봄 제도 속에서도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정말 그런 ‘선택’을 보장받고 있는지 여부만 잘 살펴보면 그만일 것일까?

돌봄의 새로운 원칙이 되어야 할 거버넌스

그렇게 선택된 돌봄은 비교 대상에 대해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봄은 그 특성상 투입한 시간이나 비용, 행정기록 등과 같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서비스 질에 대한 절대적 측정이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봄 이용자 학대와 같은 전형적인 사건은 포착될 수 있지만, 그 외 미묘한 사항들은 제대로 인식되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 제공자가 바람직한 태도와 가치관을 갖고 돌봄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 이용자들로 하여금 ‘선택’을 통해 알아서 좋은 돌봄을 찾아가도록 하고 있는 지금의 방식은 돌봄 종사자들이 이러한 소명 의식을 갖도록 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운 좋게 한 번에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요행수를 바라는 일이 될 뿐이며 삶의 주요한 환경인 제도에 대해서도 아무런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라면 ‘선택’은 이용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돌봄 제공자 역시 가차 없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돌봄 이용자와 제공자 사이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구성해보고는 적극적 상상을 하며 ‘돌봄 거버넌스(Care Governance) 즉, ‘돌봄 협치’를 꿈꾸기 시작한다.
오늘날 돌봄 기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정의 모습을 일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아이들을 알아서 자기가 돌봐야 하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국 하소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지역에는 어떤 돌봄이 얼마나 필요한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이를 신경 쓰고 있는 사람도 없다. 그저 돌봄이 필요한 가정의 아우성이 잠시 피어올랐다 돌봄을 찾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용자들은 내 욕구만 해결하면 그만이고, 현재의 제공자들은 내가 돌볼 아이들만 모집하면 끝인 근시안적인 태도들만 무성해질 뿐이다. 미래를 위해 자원을 남겨놓는 법도 없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 기관을 위한 시선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절대 강자는 아이들이 몰리는 학교일 수 있다. 학교 돌봄의 너른 잎에 가리운 지역사회 지역아동센터나 다함께돌봄센터와 같은 돌봄기관들은 목마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어려워지면 돌봄 생태계는 학교를 중심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동들을 위해서나 학교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함께 만드는 돌봄

따라서 돌봄 협치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 지역의 돌봄을 우리 지역 스스로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제도적 주체성을 지역에 부여해주는 정부 정책의 적극성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지방정부나 지자체 혹은 교육청이나 교육지원청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돌봄 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가정이 해야 할 바를 규정하고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이를 살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아동과 청소년 당사자를 중심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역의 돌봄 제도를 논의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 그 안에서 돌봄 제도의 다양한 측면들을 실제로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말이 상당히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최소한 현재 돌봄을 하고 있는 기관들을 지금과 같이 개개 시설로 알아서 돌봄을 제공하도록 놔둘 것이 아니라, 동 단위 등의 작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돌봄 공동체로 묶어 내고 이들에게 집합적 공공성을 부여하는 일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돌봄 공동체는 지금의 대부분의 협의회가 하고 있는 것처럼 돌봄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런 자유 의지의 결합은 지역에서 요구하는 돌봄과 관련한 정책적 요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현하는데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적으로 결합한 돌봄 공동체에는 향후 지역의 돌봄 수요를 함께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현재의 돌봄 공급과 수요를 견주어 앞으로 어떤 돌봄 기관을 정책적으로 더 요구할 것인지 혹은 공동체 내에서 이러한 돌봄 욕구를 서비스 조정을 통하여 해소할 것인지 여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정책 결정과 관련한 권한을 일정하게 부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속에는 반드시 돌봄 이용자 당사자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돌봄 이용자를 정책의 수혜 대상자일 뿐만 아니라 돌봄 정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특히 돌봄 제도에서 소외되어 있는 돌봄 당사자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돌봄 공동체에서 학교 돌봄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학교가 먼저 나서서 우리 동네의 돌봄을 함께 만들어가는 길 그것이 새로운 돌봄 협치가 바라는 이상향의 정점일 터이니 말이다.

성태숙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센터장

구로파랑새나눔터공부방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시설장으로 현재 까지 근무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변방의 아이들(민들레출판사) 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