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곽으로 살펴본 전북 고대사

글·박진아 칼럼리스트

인류는 태초의 순간부터 약탈을 이어왔고, 농경과 취락이 형성된 이후 침략은 더 빈번해졌으며, 국가가 형성된 이후부터는 전쟁과 방어의 역사가 무던히도 반복되었다. 초기 농경사회인 청동기 시대에는 취락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목책(木柵)이나 환호(環濠)의 설치에 그쳤으나, 농경사회에서 읍성이라는 단위로 커지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단순 방어 시설은 성곽(城廓)의 모습을 갖추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반도 남부에는 현재 약 1,900여 개의 성곽이 남아있다. 그 중 전북 지역에는 약 200기의 성곽이 확인되었고, 40기 정도가 발굴 조사 되었다. 국립익산박물관에서는 전북 지역 옛 성곽의 유물과 생활상을 한데 모아 ‘고대성곽 연구성과’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현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성곽의 의의

성곽이란 우리말로 ‘잣’ 또는 ‘재’라고 하며 한자 성(城)은 고대에는 성을 흙으로 쌓았기 때문에 ‘흙 토(土)’변을 취하고 있다. 성곽(城郭)은 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방어 시설이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 적의 침입에 대한 방위를 위해 산과 물 등 인근의 지형지물을 재료로 이용하여 쌓은 구조물이며, 이를 바탕으로 성곽 내부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주던 군사시설물이었다.
조선시대의 관리인 양성지(1415~1482)가 우리나라를 두고 ‘성곽의 나라’라고 말을 할 정도로 한반도 남부에는 수천 개의 성곽이 남아있다. 많은 학자들 또한 우리나라가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명맥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성곽 건축 기술의 발달 덕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성곽은 빼놓을 수 없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곽의 역사

익산박물관은 고대 성곽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2023년 1월 10일 ‘전북의 고대 성곽’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총 3부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25개의 성곽에서 발굴된 유물 등 290건 380점의 전시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1부 ‘시간의 울타리를 넘다’에서는 ‘성곽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장수 침령산성 집수정(물을 모으는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롯해 성곽에서 출토된 다양한 무기 및 성돌 등을 준비해 당시 성곽에서 생활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느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2부 ‘역사와 문화를 쌓다’에서는 전북 지역의 고대 성곽을 산맥과 물줄기를 기준으로 크게 여섯 개의 권역으로 구분해 25개 성곽에서 출토된 삼국시대부터 후백제 시기의 유물을 전시하여 그 특징과 조사 성과를 드러냈다.

3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다’에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전북 지역의 성곽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 지역 성곽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전북 지역에는 익산 왕궁리 유적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주변의 성곽이 있으며, 백제가 전북 지역에서 진출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점성을 비롯 백제 사비(538~660)가 지방 통치의 중심인 5방성 중 중방성(中方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정읍 고사부리성의 의미를 밝혔다. 또한, 최신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였다는 증거인 남원 아막성, 백제가 금강 상류를 사이에 두고 가야· 신라와 격전을 펼쳤던 진안 와정토성·월계리산성과 같은 중요 성곽들도 확인해볼 수 있다.

성곽의 유물

백제 5방성 중 중방성(中方城), 정읍 고사부리성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은 행정구역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해발 133m)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고사부리성은 백제 오방성(五方城) 중의 하나인 중방(中方)성으로 성황산의 두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 1,050m, 장축 길이 418m, 단축 길이는 200m 내외다. 이번 전북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는 남성벽 내측 평탄지를 대상으로 진행했으며, 이는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부에 해당된다.
고사부리성에서 발견된 막대형 목제 유물 중에서 상하 방향으로 새긴 ‘상부상항(上卩上巷)’명이 확인됐다. 이는 상부상항(上卩上巷)이 새겨진 최초의 목제 유물이자, 온전한 형태로 확인된 첫 사례이기도 해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上卩上巷은 글자 그대로는 上卩 중에서도 上巷이라는 뜻으로 주소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제와 신라의 대격전지, 남원 아막성
남원 아막성은 백제 무왕이 신라 공격의 최전선으로 삼은 곳으로, 삼국시대 말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당시 신라성이었던 아막성은 전략적 요충지로 602년 백제가 공격한 이래 616년 3차 공격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대격전지였다. 백제 무왕은 신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아막산성을 차지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이어갔지만, 결국 패배하고 방어에 성공한 신라는 운봉고원과 소백산맥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얻게 되었다.
신라성 중 최고의 기법으로 석축된 아막성은 발굴 현장에서 여러 유물이 발굴되었다. 다양한 건축물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와와 가야,신라, 백제의 토기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곰, 고라니, 소 등 동물 뼈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 보존돼야 할 성곽들은 시간의 풍화 속에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당대의 기술과 생활상 그리고 역사적 가치를 함유한 수많은 유물들은 여전히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북의 고대 성곽’이라는 전시를 통해 체계적인 관리와 연구 속에서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할 성곽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경각하는 계기를 갖게 되길 바란다.